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온 군중들에게 "말씀"도 주시고 "치유"도 해주시며 돌보시다가 어느덧 날이 저뭅니다. 이제 군중에게 육신의 양식도 절실해질 만한 시간이 된 것입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루카 9,12)
놀랍게도 제자들이 군중의 필요를 알아채네요. 그리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말투가 정보 전달이나 청원의 성격보다 어째 명령에 가깝게 들립니다.
흔히 사람은 은총을 통해 영의 세계를 접촉하고 맛보기 전까지는 직관이나 영감, 믿음보다 데이터와 논리, 합리성에 더 의존하기 마련이고, 타인에게도 그걸 당당히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경험한 세계까지는 그것이 우위를 차지하니 그게 전부라 여기는 겁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예수님의 말씀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담백합니다. 제자들의 형편과 현실적 사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던지시는 이 말씀은,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저희에게는 ...밖에 없습니다."(루카 9,13)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정해 주시고 발휘하도록 틈을 내어주시는데 반해, 제자들은 이성적으로 자기들의 한계를 파악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묶어둡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인간의 "최대치"를 바라보시는 반면, 인간의 시선은 자기들의 "최소치"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제자들이 "...밖에"라고 지칭한 보잘것없는 소량의 음식을 가지고 예수님은 그것들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풍부한 봉헌물이라도 되는 듯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 바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지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국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게 된 것입니다.
빵과 물고기의 양이 늘어난 이 기적이 예수님의 기도 중에 일어났는지, 제자들이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17)는 말씀으로 그들과 함께 영육의 풍요와 기쁨, 기대감과 희망을 누릴 뿐입니다.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경계를 넘어서면 숫자든 수치든 타이밍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제1독서는 살렘의 임금 멜키체덱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빵과 포도주로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창세 14,18)가 마련한 빵과 포도주는 세상을 구원하신, 영원한 사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미리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 아브람이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은 십일조 전통의 시초가 됩니다. 이는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레위 27,30)라는 계명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9)라는 규정에 잘 나타나 있듯 "나눔"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마지막 만찬의 장면이 사도 바오로의 입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1코린 11,24)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1코린 11,25)
예수님이 당신 몸을 베어내고 헐어내고 쪼개어 내주시는 살과 피는 오로지 "너희를 위한", 즉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사랑, 사랑, 흔히 말들은 많이 하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사랑을 흉내낼 수 있는 은총은 (아쉽게도, 다행스럽게도) 아무에게나 주어지진 않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나눔의 보람과 기쁨이 넘실대니 더 이상 이 현장은 제자들이 말했듯 "황량한 곳"(루카 9,12)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주시기보다 제자들의 손을 통해 나누어 주신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무언가를 나눌 수 있도록, 줄 수 있도록 마련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인간에게는 순명하는 분배자의 역할이 맡겨졌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손에 쥐어 주시는 모든 것에는 이처럼 당신의 뜻에 따라 나누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물리적으로 살과 피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이 독식하여 우리의 살과 피가 될 것을 나누어 그것이 필요한 이웃의 살과 피가 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실상 나눔은 죽음의 경험입니다.
물리적으로 나와 내 식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욕구의 중단이고 내 생명에 더해질 양분의 포기이기에 일차적으로 볼 때 죽음의 체험이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의 인연에서 죽음을 고한 그 양식과 재화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나누어지고 베풀어질 때 그에게 새로운 생명이 됩니다. 나의 죽음이 타인에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대부분의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명을 내놓으라는 요구 앞에 서지는 않지만, 예수님처럼 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쥐어주신 모든 것을 나와 내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이웃을 위해 나눌 때, 그 유대와 연대의 연결 고리를 통해 생명이 이어집니다.
실제로 목숨을 바쳐 생명을 주신 예수님보다, 열 달을 품어 생명을 주는 여느 엄마들보다, 훨씬 쉽고 덜 고통스러우면서도 보람과 기쁨은 그에 못지 않은 생명의 나눔이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를 재촉합니다.
아무리 작은 나눔이라도 그 안에는 죽음과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나누고 축복하는 우리는 모두 멜키체덱과 같은, 예수님과 같은 사제입니다. 이 사제직에 참여하는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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