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dariaofs 2019. 6. 25. 04:40



분단된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오늘, 우리는 용서와 자비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신명 30,3)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이들을 기꺼이 다시 품어 주시는 하느님의 연민과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용서를 베푸는 이의 원형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용서는 한 번으로 끝나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또다른 용서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용서를 관상하다 보니 용서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같이 보입니다.


존재 밑바닥까지 내동댕이쳐진 비참한 순간에 받은 용서는 그 사람 안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고, 마치 여인이 태아를 잉태하듯 존재 안에 깊숙히 남게 됩니다.


그렇게 잉태되어 품어진 용서는, 적절한 때에 용서가 필요한 이에게 마치 생명을 출산하듯 베풀어집니다. 하느님에게서 시작된 용서가 저마다 부족한 우리 사이를 뚫고 들어와서 돌고 돌아 서로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용서가 흘러간 자리를 사랑이 단단하게 이어주고 결속시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이니 무엇보다 사랑을 입어라."(영성체송)고 권고하는 것이겠지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복음에서 예수님은 용서를 의무로, 당위성으로 이야기하십니다. 베드로가 제 딴에는 최대한의 수로 일곱 번을 불렀지만,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 즉 완전한 숫자 일곱을 두 차례 반복한, 무한을 가리키는 수를 제시하십니다.

통상적으로 명사는 수를 셀 수 있는 명사와 양으로 가늠하는 명사가 있지요. 예수님께는 "용서"란 단어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숫자로 제한해서는 안 되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실상, 진정한 용서에 '이번은 되고 다음은 안 된다'거나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적용이 불가능한 이유는, 용서가 하느님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그 용서를 잉태하고 출산한 이, 인간적으로 감정적으로 몹시 힘들면서도 용서를 발휘하는 이가 베푸는 용서는 자기의 용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문맥상, 용서 이야기 이전에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마태 18,19)이라는 내용이 먼저 나오지요. 흔히 함께 기도 드리면 들어주신다는, "기도"에 대한 주제로 접근하는 구절입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 대목인 마태 18,15-18에서 먼저 죄지은 형제를 타일러 도우라는 권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앞뒤로 형제의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루는 대목이 이어지는 마당에 왜 갑자기 '두셋이 함께 마음을 모아 드리는 청'에 대한 말씀이 끼어든 걸까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마태 18,20)은 우리 가족, 공동체, 단체 등의 기초 단위를 가리킵니다.


다들 경험해 봐서 알겠지만,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꼭 용서할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용서 이전에 맘 상할 일, 불목할 일, 갈라질 일이 선행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얼핏 자연스럽고 흔한 일 같지만 실상은 그야말로 대단히 복음적이고 신앙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분명 그 중 누군가 드러나지 않게 자기를 죽이고 양보하고 용서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그러니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과 갈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은 곧 당신께서 이 소용돌이 속에서 친히 화해와 일치를 위한 "용서"가 되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복잡해지고 분화될수록 용서를 요구하는 언짢고 불쾌하고 슬프고 화를 돋우는 일들도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요. 그렇다고 무조건 관계를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용서의 지혜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 5,1)


하느님께는 용서의 숫자나 횟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말씀을 하실 줄 모르십니다.


이미 하나의 용서 안에 다 포함되는 일과 사람에 대해서 일일이 다시 검증하고 끄집어내서 제외하실만큼 하느님은 한가하지 않으십니다. 용서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그렇다면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도 저마다 가능한 만큼만이라도 닮으면 좋겠지요.

그렇다고 용서가 마냥 쉬운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이미 우리는 굴곡지고 피묻은 역사를 통해서 절절히 체험하고 살아가는 중이니까요. 바로 지금도 지독히 고통을 당하고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떨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외면해서는 안 되고, 또 그들에게 무조건 용서하라고 들이대서도 안됩니다.


그저 곁에서 가슴 저리는 사랑으로 함께 걸으며, 다만 용서는 받는 사람이 수혜자가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수혜자라는 진실을 조용히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입당송)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용서를 베푼 이가 받는 선물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우리 모두의 바람이지요. 그러니 함께 청합시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함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아픔에 우는 이, 슬픔에 무너진 이, 소외로 웅크린 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 실패로 좌절한 이, 죽고 죽이던 역사 안에서 피눈물을 삼킨 우리 모두, 벗님 모두에게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