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태7,21)
오늘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아버지 뜻의 실행"입니다. 아무리 '주님, 주님' 불러 봐야, 그분 이름으로 예언과 구마와 기적을 일으켜 봐야 소용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당신 이름을 부를 때는 고통 당하는 이를 봐서 기적과 치유를 일으켜 주시긴 했지만, 정작 마음에도 없는 이름을 사랑 없이 빈말처럼 불러댄 이들에 대해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태 7,23)고, 당신과 관계가 없다고 냉정히 자르십니다.
문제는 "실행"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와 "실행하지 않는 이"로 나누시고, 전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으로, 후자는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유하십니다.
집을 지을 때는 아무래도 지반의 상태에 신경을 쓰게 되지요. 오래 안전하게 사용하려면 기초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면 단단한 돌을 뚫고 기초를 놓아야 하는 수고로운 반복 작업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걸 감내한 이들만이 집을 오래 보전하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지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해서 비와 강물의 범람과 바람이 피해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마찬가지로 자연재해와 세파를 똑같이 겪되, 다만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뿐이지요.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슬기로운 이나,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이나 누구도 인생에서 십자가를 피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겪되, 수고와 인내로 아버지 뜻을 실행한 이들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쉽고 안이하게 겉보이는 허세로 포장하며 살아온 이들은 쉽게 무너진다는, 그 차이일 뿐입니다.
보통 의인이라 여겨온 이들이 고난을 겪는 걸 보면 흔히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렇게 열심한 사람에게...'라고 생각하며 고난 자체를 하느님의 외면이나 징벌로 여기지만,
실상 그에게 고난은 믿음을 견지하고 하느님 뜻에 깨어 있도록 삶으로 들이치고 밀려드는 비바람과 강물 정도일뿐, 무너뜨리는 힘이 되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브람의 두 여인, 하가르와 사라이의 갈등이 전개됩니다.
아이를 못 낳는 본부인 사라이는 이미 주님께서 아들을 예고해 주신 바가 있음에도(창세 15,9-15) 인간적 조바심과 조급함으로 자기 여종을 아브람에게 아내로 내주지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하느님 약속에 인내와 믿음을 갖고 기다리기보다, 당장 종을 통해서라도 결과를 얻고 싶은 마음에서였을지는 모르지만, 이 과정에서 여성간에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 벌어집니다.
하가르는 이방인에 여성이고 종이며 첩의 처지에 있는 철저한 사회적 약자입니다.
임신까지 했으니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묶여 있는 상태지요. 그런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광야로 도망칠 정도라면 여주인 사라이의 구박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라이의 여종 하가르야.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창세 16,8)
당장 하느님 축복에서 제외된 듯 보이는 도망자, 이방인 첩, 임신한 종에게도 하느님의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천사의 질문을 통해 당시 하가르의 처지와 실존을 일깨우십니다. 또 이 질문을 통해 각자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멀어지고 있는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주겠다."(창세 16,10)
철저한 가부장사회인 이스라엘에서 후손의 약속은 아무래도 대개 남성에게 내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삼손이나 예수님의 경우 그 어머니들에게 "아들"을 예고하신 바는 있지만, 씨족의 대를 잇고 민족의 역사를 형성하는 "후손"이라면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요.
임신한 여인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황량하고 위험한 무법천지 광야로 도망쳤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인데, 외롭고 비참하고 고통스런 순간에 주님의 천사로부터 직접 "후손"의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당시 하가르의 목숨은 물론 뱃속의 아기의 생명도 보증해 주는 엄청난 힘인 셈이지요. 하가르는 문이 닫힌 곳에서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시고, 희망이 없는 순간에 희망을 심어 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것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에게 복종하여라."(창세 16,8)
이 명령과 순명은 모두를 살립니다. 그녀가 돌아온 덕에 사라이도 그나마 남편과 선조들에게 면이 섰을 것이고, 그날의 약속을 간직한 하가르는 사라이의 학대가 아무리 모질어도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가르는 아들 이스마엘이 열세 살 되던 해에 사라의 요구로 부족에게서 쫒겨나게 될 때까지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견디어내며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창세 21,8-21 참조)
오늘 저는 예수님 말씀의 프리즘을 통해 하가르를 새롭게 만났습니다.
처절한 고통의 순간에 천사가 전해 준 주님의 말씀만 믿고 고통의 자리로 돌아가 견디어 낸 그녀는 결국 "그 여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창세 21,13)는 하느님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 이름을 수천 수만 번 부르고 예언과 구마와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삶은 환난과 역경에서 분리되는 진공상태 영성이 아니라, 오히려 환난과 역경에도 무너지지 않는 오뚝이 영성을 가리킵니다.
그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고, 사랑 때문에 주님의 말을 지키면, 성 삼위 하느님께서 친히 그에게 오셔서 거하실 것입니다. 이미 벌써 그는 하늘 나라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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