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안식일 논쟁을 촉발하는 사건(마태 12,9-13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이 하나 더 일어난 뒤, 오늘의 복음 대목으로 이어집니다.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 규정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시는 예수님이 못마땅해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마태 12,14) 하지요.
율법 조항들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의무를 다해온 그들은 예외가 만드는 작은 실금들이 자칫 전체를 뒤흔드는 균열로 이어질까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마태 12,15)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아직 당신의 때, 아버지의 때가 오지 않은 줄 아시기에 고요히 물러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을 표현하기 위해 인용한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이사 42,1-4)에도 나오듯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마태 12,20)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마태 12,15) 물러나신 예수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분명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피해 변두리로 물러가신 건데 사람들이 굳이 예수님 뒤를 따라오는 겁니다.
종교 중심지에서 공인된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받아보지 못한 관심과 배려, 인격적 눈맞춤이 그들을 매료시킨 걸까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면서 백성을 위해 움직이시는 장소가 중심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 한가운데가 아니어도, 종교 지도층 휘하가 아니어도 하느님의 은총과 만날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빌미를 제공한것이 안식일 치유였음에도 예수님은 그치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일, 아버지의 일을 하십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모든 율법 규정을 우선하는 하느님의 뜻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 내면에 강인하고 굳건한 심지가 보입니다.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마태 12,19) 않으시지만 "올바름을 선포"(마태 12,18)하는 데에서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섬이 없으신 주님의 종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파스카 밤의 광경이 펼쳐집니다. 온 이스라엘이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대목에서는 "모세"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순간을 위해 활약해 왔고 앞으로도 활약할 민족의 지도자인데, 지금 이 순간에는 모세 대신 주님께서 전면에 드러나고 계십니다.
파스카의 선두에는 그동안 중간 역할을 하느라 수고한 모세를 넘어서 진정 하느님께서 계심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탈출 12,42) 순수 영이시고 물질과 형상에 매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표현하기 위해 때로는 의인화 기법을 사용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처럼 낮과 밤 구조에 묶여 계시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빠져나가는 다급한 상황에서 내내 충실히 희생적으로 곁을 지켜주셨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밤을 새우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신 하느님께서 실제로 인간이 되신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의인화된, 육화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인간처럼 표현해서라도 보다 더 가까이 그분을 느끼고 싶었던 사람들의 염원에 대한 응답이고 실현이지요.
당신 백성을 위해 쉼의 때인 밤 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우신 하느님의 유전자는, 법이 규정한 쉼의 날임에도 자비의 행위를 멈추지 않으시는 예수님에게로 당연히 이어집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들 중 하나를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바로 그 "선택받은 종"이심을 밝힙니다.
백성 가운데에 "올바름"을 세우되 무력이나 재물, 율법에 기대지 않고 사랑과 자비에 기대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실 분이라는 소개입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율법은 관리자의 시각이 아닌, 수혜자의 입장에서 사랑과 자비의 시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시점에 다다랐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느님 현존의 중심 이동은 예수님께서 물러나신 장소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로의 회귀까지 요구합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금지 규정에 순응하던 차원에서, 더 사랑하기 위해 "그 이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느님 심장에서 찾아내어 실행하는 자발적 차원으로 넘어서라는 초대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초대에 순응하여 더 사랑하고 더 자비를 베푸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강 론 말 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9.07.2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0) | 2019.07.22 |
|---|---|
| 2019.07.21. 연중 제16주일 - 오상선 바오로 신부 (0) | 2019.07.21 |
| 2019.07.19.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0) | 2019.07.19 |
| 2019.07.18.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0) | 2019.07.18 |
| 2019.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0) | 2019.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