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7.18.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dariaofs 2019. 7. 18. 05:13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말씀하시는 분의 의지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예수님께서 삶에 짓눌려 허덕이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모두" 당신께 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자신감이 묻어 있습니다.


당시는 물론 오늘날 인간 실존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데다, 그 해결책을 바로 당신께서 주실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영육으로 지친 이들에게 예수님이 주실 선물은 바로 "안식"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쉼 없이 달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더 가지려고, 더 영향력을 끼치러고 자신과 주변을 몰아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해볼 만큼 다 하고 나서 탈진해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이들도 있습니다.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 세우고 덧쌓고 허무는 욕망의 탑은 저마다의 개성만큼 다양합니다.


그 욕망이 자신을 갉아먹는 줄 모르는 채 탑 쌓기에 골몰한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건 안식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시지만 우유부단하거나 나약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 아시기에 당당하고 확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자신감은 스스로를 잘 아는 겸손에서 흘러나옵니다.

자기 꼴을 조금씩 알아가는 이라면 타인에게 "나에게 오너라!"라든가 "나에게 배워라!"라는 말을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자신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내세울 것도 없으며, 오히려 드러날까봐 전전긍긍 하게 만드는 어둠과 죄악의 실체를 직면하게 되니 그렇습니다.


그러니 당신께 배우라는 예수님 말씀은, 자신은 물론 타인과 세상에 지친 우리에게 참 새롭고 신선한 초대입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밝혀지는 역사적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절규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계약을 기억하신 하느님께서 모세의 질문에 당신 이름을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밝히십니다.


그분은 누구에게도 어디에게도 기인하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참 존재자이십니다.

"있는 나". 있음은 처음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영원한 현존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세상 누구도, 역사의 어느 순간도 하느님의 현존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있음"이 온 세상 모든 역사의 씨줄 날줄을 엮어 오셨고 여전히 엮어가고 계십니다.

"너희를 끌어 내어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탈출 3,17)


하느님의 굳은 결심이 느껴집니다. 그분은 모세에게 당신의 확고한 의지를 단호히 피력하십니다. 그분의 결정에는 그 자체로 실현이 담겨 있습니다. 그 실현이란 오늘 독서 마지막 부분에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탈출 3,20)

모세는 이처럼 부르심의 순간부터 하느님께서 이루실 일의 결과까지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모세에게는 "있는 나"께서 완성하실 일에 대해 일말의 의혹이나 의구심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세상이 메워 준 멍에를 벗고 하느님의 멍에를 메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고역이었던 세상 멍에가 더 달콤하고 수월했다는 망각적 향수에 사로잡혀 후회와 불평, 반항과 반역의 헛발질로 헤매기도 할 겁니다.


이 모든 걸 아시고도 당신 백성에게 자유와 해방을 이루실 하느님은 진정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


주님이 지워주시는 멍에가 세상 안에서 바둥거리며 지고 있는 멍에보다 편하고 가볍다고는 하지만, 사실 두 멍에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비교선상에 놓고 저울질하다보니, 전환의 과정에서 마찰과 소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이 곧 이 전환의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에게 오너라!" "나에게 배워라!" 하시는 예수님의 멍에를 받아 지려면 일단 지고 있던 세상의 멍에는 벗어야겠지요. 그 고통스런 무게는 물론, 익숙함까지도 내려놓고 떠나보내야 새 멍에와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종살이의 멍에를 벗기고 지워주실 새 멍에가 자유와 해방을 약속한다면, 예수님께서 지워주실 새 멍에는 진정한 안식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길 원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온유와 겸손으로 오늘의 고생과 짐을 집시다. 그분이 함께 가볍고 편한 멍에로 받쳐 주시겠다는데 그 까짓 것 뭐 별거 있겠습니까. 아자아자!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