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해 주신 당부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래서인지 말씀 행간에 예수님의 다정한 격려가 배어 있지요.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앞 부분(마태 10,34-39)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께 합당한 제자의 모습을 제시하시고, 뒷 부분(마태 10,40-11,1)에서는 당신의 제자에게 부여될 위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훗날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주시는 대목(요한 20,19.21)을 기억하는데, 한 입으로 두 말 할 리 없으신 예수님께서 지금 무슨 이유로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이제 막 사도로서의 사명에 들어선 제자들은 따름을 위한 버림과 떠남에 이제 막 입문한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곁에 머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에 뛰어들기에는 여전히 기존의 것들과의 유대와 결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평화"란 그동안 가족을 포함해 세상과의 관계에서 유지해온 적당히 안정적인 위로 상태일 것이고, "칼"은 그간 맺은 관계들을 뒤흔들고 뒤엎고 잘라내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하도록 새 질서를 잡는 힘을 가리킬 겁니다.
"...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우리는 부정적 결론 앞에서 마치 위협이나 으름장처럼 느껴 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편안한 뉘앙스로 바꾸어 읽어 보니, "나를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합당하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끔찍이 아끼는 부모나 자녀일지라도 자기를 지으신 주님과의 관계가 먼저임을 인식하고, 모든 만물 첫 자리에 주님을 모실 때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도 차츰 제 자리를 잡아갑니다.
"받아들이는 이/사람."(마태 10,40)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 말씀에는 엄청난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부족한 죄인이라도 제자들이 곧 하느님의 대리자이며 결국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풀 한 포기, 쌀 한 톨에도 우주가 들어있듯, 보잘것없이 가난한 영혼 안에도 하느님께서 깃들어 계십니다. 받아들임은 상대의 내면 겹겹 안에 깊숙이 숨어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지요.
"그가 제자라서."(마태 10,42)
게다가 제자라는 이유로 호의를 입게 되면 호의를 베푼 이에게까지 상이 돌아간다고 하시니, 낯선 사람들과 선교 현장을 앞두고 긴장한 사도들의 어깨가 조금은 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1독서는 탈출기 도입부입니다. 이집트와 온 세상을 기근에서 구하고 이집트를 강대부국이 되게 일조한 요셉에 대해 알지 못하는 파라오의 등장으로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탈출 1,22)
파라오는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어리석음의 전형입니다.
스스로는 이를 "지혜"(탈출 1,10)라고 착각합니다만, 어떠한 지혜도 대립과 증오, 적대 관계와 죽음을 야기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곧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탈출 1,12) 나가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우방이나 아군으로 끌어안아 함께 번영하는 길을 모색하기보다 적으로 규정해 억압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맏아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 파라오는 사실 받아들임을 거부한 대가로 국가적 참사를 야기한 인물이라 기록될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교 여행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과 마주하겠지만, 자기들을 받아들여 줄 이들에게 되갚아 줄 축복을 한 아름 안고 파견되는 것이니, 그 발걸음 또한 자신감 넘치고 당당할 수 있을 겁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내 아버지도 그와 함께할 것이다."라는 뜻의 예수님 격려는 이제까지 익히 들어온 어려움의 순간마다 제자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예수님의 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평화는 혈연과 민족을 뛰어넘는 새 질서입니다. 기존의 고리른 과감히 끊고 상대가 누구이건 그를 보내신 예수님,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을 얻는 진짜 지혜가 요구됩니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께 예언자 대접을 받고 의인 대접을 받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의인을 의인으로, 제자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도 발걸음도 가볍게 주님의 파견을 받아 떠나십시오.
여러분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선물로 안겨주시고, 또 여러분이 만나게 될 주님의 제자들을 온전히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듯 받아들임으로써 복된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성 보나벤투라의 이름처럼, "좋은 일이 있을지어다!"(bona ventura!)가 오늘 벗님의 축원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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