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dariaofs 2019. 7. 16. 04:19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하느님이 숨어 계십니다. 문자상으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으시지만 등장인물들을 통해 현존하셔서 우리가 그들을 통해 하느님 마음을 감지할 수 있게 이끄십니다. 함께 이 '숨어 계신 하느님'을 한번 찾아볼까요?

제1독서인 탈출기는 모세의 탄생을 다룹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하느님의 사람이지요. 하지만 원래 그의 탄생은 죽음을 배태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탈출 1,22)라는 파라오의 명령이 그에게 역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 동족인 가족과 이집트 공주, 양 쪽 모두의 보호로 목숨을 부지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것을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였다."(탈출 2,6)


이방인, 그것도 이스라엘에 죽음의 칼날을 겨눈 이집트 왕실의 공주에게서 숨어 계신 하느님을 봅니다. 생명을 위협받는 작고 가난하고 약한 존재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안에는 그가 누구이건 하느님이 현존하십니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탈출 2,10)면서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물 속 상자에 담긴 아기를 구해낸 이집트 공주에게서 우리는 훗날 "바닷물을 밀어내시어"(탈출 14,21)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죽음의 권세를 상징하는 물에 삼켜지지 않고 살아난 모세는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탈출 14,29) 살아난 이스라엘 백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례 때 물로 죄를 씻기우고 정화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마태 11,21.23)


당신이 직접 다니시며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아 주시던 지역을 일일이 거론해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노기에 찬 목소리가 들립니다.


백성을 향해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다정하고 따사로운지 아는 우리로서는 이 날선 목소리가 적잖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지요.

복음사가는 이 꾸중의 이유를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킨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마태 11,20 참조)이라고 밝힙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이 세 지역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 자리하고 있으니 어쩌면 예수님을 너무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고을들이었나 봅니다.


간절히 찾아 헤매거나 애타게 청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의 현존과 가르침, 기적의 혜택을 너무 쉽게 누리다 보니 그 가치와 의미를 간과했던 걸까요? 이들은 어쩌면 종교적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우리같은 종교인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들에게 부어진 특별한 사랑이 깊은 회개의 열매로 맺히지 못하자, 예수님은 이에 안타까움을 느끼시며 그들을 일깨우시는 겁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 마음의 고통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아픈 상처가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사랑을 퍼부으신 하느님은 번번이 우상숭배로 배반과 모욕을 당하셨지요.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안에는 이스라엘도 들어있고,


또 특별히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진정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기를 미루며 미지근하게 무늬만 띄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들어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는 주님께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아쉬울 것 없는 그분이 무슨 대가를 원하시고 죽음과 죄악의 오류라는 급류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 아니지요.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우리는 매순간 사랑으로, 사랑이신 주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응답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가족과 지인 등 이미 잘 조성된 종교적 환경 덕분에 너무 쉽게 주님을 만나고 누려왔다면 그만큼 감사하며 주님과의 결속을 다져나가야 하겠습니다.


또 내가 고통과 죽음의 물살에서 겨우 건져내어져 주님을 극적으로 만났다면 그 어둠과 상처의 무게만큼 더 절실하게 주님께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또 내가 오랜 미혹과 갈망의 미로를 돌고 돌아 겨우 그분을 만났다면 그간 쌓인 절원의 두께만큼 귀하고 소중히 그분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중 누구도 오늘 예수님의 꾸짖음을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들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님, 오늘 예수님과 한 마음으로 외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사랑의 안타까움으로 요동치며 호소하고 계심을 생각하십시오.


숨어 계신 주님께서는 오늘 천국, 지옥의 결과론적 으름장이 아니라 바로 지금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벗님에게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벗님을 '죽음의 물'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때론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는 사랑의 절박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맞갖게 응답하는 회개의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