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8.07.23.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dariaofs 2019. 7. 23. 05:59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생물학적 가족과 영적인 가족이 등장합니다.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마태 12,46)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은 "밖"에 서 있고,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있다는 배경 설정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를 단순히, 예수님이 가족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 일을 하시는 대인적 면모가 있으시다거나, 가족에게 좀 매몰차고 냉정하다든가, 성모님이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하는 식으로 본다면 너무 인간적 관점에 멈춰버린 것 아닐까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사실 이 질문은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우월감과 편협한 폐쇄성으로 변질되어 버린 당시 유다인들에게 던지시는 질문인 동시에, 세계화 시대, 소통의 시대를 사는 현대 사회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마치 각자가 생각하고 고려하는 가족의 경계, 형제 자매의 테두리는 어디까지인지 숙고하도록 반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예수님은 혈연적 가족 관계를 부인하시는 게 아니라, 그 관계성을 확장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처럼 넓게 확대된 가족의 뿌리에, 중심에, 정점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인류를 새로운 가족으로 묶어줄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실행하는 하느님의 뜻은 곧 사랑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본능적 본성적 명제를 탈피해, 나와 너, 내 식구와 남의 식구, 내 민족과 타 민족, 우리 종교와 다른 종교를 구분하지 말고 한 아버지의 같은 자녀로서 서로 아우르고 보듬고 돌보고 보살피라는 것,


모두에게 이로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랑이 하느님의 뜻이지요. 더욱이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은 이미 구석구석 감추어질 수 없이 서로에게 환히 드러나는 소통과 공유의 현장입니다.


낡은 연결 고리를 넘어 새로이 연대하고 결속하여 서로를 살리는 보편적 사랑이 온 인류, 모든 피조물을 주님의 가족으로 엮는 힘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어찌어찌 이집트를 나오기는 했지만, 지금 뒤로는 파라오의 군대, 앞으로는 시퍼런 바닷물 사이에 끼인 진퇴양난의 순간을 맞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들 앞에서 하느님의 권능의 팔이 펼쳐지지요.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땅으로 만드셨다."(탈출 14,21)

이윽고 그들 앞에 마른땅이 열립니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탈출 14,22) 물은 생명과 정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죽음과 파멸의 힘이기도 합니다.


그런 물이 마치 든든한 호위병처럼 이스라엘 민족 양 옆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는 것은, 물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해 일시적으로나마 자기의 본성을 바꾸었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데 잠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로움을 선사했던 물이 파라오의 군대에게는 얼굴을 바꿉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음과 파멸의 힘을 과시한 것이지요. "물이 되돌아와서 ...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탈출 14,28)

파스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과 민족의식, 자부심을 선사합니다.


이 사건은 세기를 거치면서 민족적 구심점으로 공고히 자리잡지요. 그런데 아무리 큰 은총을 받았어도 이를 폐쇄적이고 편협한 선민사상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그 은총을 헛되이 사용하여 유실하는 것이 됩니다.


아마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같은 편"이어서 보호를 해주시고 "반대 편"인 이집트에게는 재앙을 내리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편가르기에 심취하다 보면 내 민족과 타 민족, 정결과 부정, 의인과 죄인 등 피조물을 자꾸 구분하고 가르고 소외시키는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야말로 하느님께서 불편하게 여기시는 악일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군대를 치신 것은 이방인을 억압하여 자기 민족의 잇속을 챙기고 약자의 생명을 학대하고 해친 악,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살기 원했을 때 하느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완고한 마음으로 무시한 태도에 대한 징벌이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공정하신 하느님께서 고작 내 편 네 편 따져 민족적 희비극을 연출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본능, 본성을 넘어서는 가족을 새로이 정의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곧 당신 가족이라고 명백히 밝히신 것입니다.


이제 혈연, 민족, 성별, 신분, 인종, 종교, 학력 그 무엇도 주님의 가족 형성에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약자와 가난한 이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명백히 드러난 하느님의 뜻입니다.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크게 혹은 작게 이 사랑을 행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주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일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49) 예수님께서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세상을 향해 우리를 소개하십니다.


부족하나마 아버지 뜻을 찾고 따르고 실행하려 애쓰는 우리를 자랑스러워 하시는 그분 곁에서, 우리를 이어준 이 새로운 가족의 끈이 그침 없이 계속 연장되고 확장되길 소망합니다.


언젠가 온 인류 모든 피조물이 형제 자매 부모로 엮일 때를 기대합니다. 오늘 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가 되어주신 벗님을 기억하며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