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모여든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을 하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3) 이스라엘의 파종법은 이랑과 고랑을 짓고 구멍마다 몇 알의 씨앗을 넣는다든가, 알맞은 생장 조건에서 미리 씨를 심어 싹을 틔운 뒤, 모종을 심는 우리네 파종법과는 사뭇 다른 듯합니다.
너른 밭 어디에나 씨앗을 무턱대고 마구 뿌려대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길에 떨어져... 돌밭에 떨어졌다...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마태 13,4.5.7) "길"은 잘 닦여진 도로라기보다,
사람들이 밭을 가로질러다니면서 다져진 부분이고, "돌밭"은 흙 입자가 고르지 않아 비교적 알갱이가 굵은 흙덩이나 작은 돌들이 모여 있는 부분일 겁니다.
또 "가시덤불"은 밭 가장자리에 자생한 가시나무와 밭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생겨난 그늘로 흙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으나 가시들 때문에 발아한 싹이 제대로 성장을 할 수 없는 장소를 가리킬 겁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씨를 뿌립니다. 죽을 게 뻔한 곳까지 뿌려지니 낭비가 될 게 뻔한데 개의치 않습니다. 딱 좋은 땅에만 뿌리면 더 경제적이고 시간도 절약할 텐데 왜 이렇게 마구잡이로 파종을 할까요?
제1독서에서는 광야살이에 슬슬 지쳐가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평이 들립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에 끌고 왔소?"(탈출 16,3)
제3자인 우리가 들어도 하느님이 참 억울하시겠다 싶은 불평입니다.
이집트인들의 억압에 못 살겠다고, 살려달라고 절규하던 이들이 당시의 노예살이를 풍요로운 안정 상태로 각색하고 있고, 이집트 탈출이 "광야에서 우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는 목적으로 탈바꿈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못할 말이 없다지만 이런 고의적 왜곡은 모세에게는 물론 이미 하느님의 마음에 너무 큰 생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탈출 16,4) 그런데 하느님은 마치 그들의 불평을 못 들으신 듯,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겠다고 하십니다.
양식을 바라는 이들의 마음이 어떠했든 상관치 않으시고 모두에게 양식을 주려 하십니다.
여전히 원망에 싸여 있는 이에게도, 삐딱하게 꼬여 있는 이에게도, 이집트 땅을 힐끗대며 양다리를 걸치는 이에게도 똑같이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헤픈지요...
다시 복음으로 돌아와 씨 뿌리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며칠 후 예수님께서 비유의 뜻을 풀어 주시는 대목에서 알게 되겠지만 씨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씨 뿌리는 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어주시는 하느님에 비길 수 있겠지요. 그런데 씨를 사방팔방 무턱대고 뿌리시네요. 애초에 좋은 땅만 겨냥해 씨를 뿌렸다면 손실을 줄일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하시는 걸까요?
하느님은 말씀을 내리실 때,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주실 때, 터전의 상태를 일일이 따지지 않으십니다. 즉 좋은 땅에만 기회를 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길이건 돌밭이건 가시덤불이건 씨를 품을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설령 손해와 낭비가 되더라도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말씀을, 아드님을 헤프게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척박한 곳에서 싹도 틔어보지 못하고 죽는 여느 씨처럼 말씀이신 예수님도 어느 땅을 만나느냐에 따라 하릴없이 생명을 잃으실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얼마나 헤프십니까! 씨앗만이 아니라 외아드님까지, 당신 자신까지 다 내어주시니 말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늘 좋은 상태의 땅만은 아니었을 그동안 내게서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튕겨져 나갔고, 은총이 유실되었고, 성체로 모신 예수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지요...
그럼에도 우리를 제외하지 않으시고 다시 풍청풍청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은 그야말로 대책없는 낭비꾼, 사랑의 낭비꾼이십니다.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탈출 16,4) 꼭 하루 분량만 거둬들여야 하는 만나는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과 의탁, 순명의 척도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 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청하는 대목과 일맥상통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미지의 때를 위해 여분의 것을 비축해 놓으려는, 믿음 없고 탐욕스런 인간 본성상 잘 지키기 어려운 요구 중 하나일 겁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양식이다."(탈출 16,15)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만나,구약 시대 이후 예언자들을 통해 백성에는 내리신 말씀, 말씀의 육화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나눠 주신 가르침, 예수님께서 남기신 성체, 그리고 오늘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계신 말씀...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뿌리시는 씨는 태초부터 인류가 하느님과 연결되지 않았던 때가 단 한 순간도 없었음을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 상태와 상관 없이 꾸준히, 변함없이, 신뢰 가득한 손길로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은 손익을 계산할 줄도 모르시는 헤프고 바보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열매를 보고 수익을 기대해 씨를 뿌리시는 게 아니라 어느 조건의 땅이건 그렇게 씨가 뿌려지고 쌓이고 또 쌓여 썪고 거름이 되면 언젠가는 좋은 땅이 되리라는 걸 기대하시기에 그리 하십니다. 열매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목적이신 겁니다.
언제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천년도 하루같은 그분께 인간이 정한 시간은 크게 의미가 없으니까요. 땅의 경계가 바뀌고 지질이 바뀌고 지형이 바뀌면 언젠가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씨 뿌리는 분의 손길에 우리를 활짝 펼쳐놓고, 뿌려지는 씨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존재적 기다림의 시간이 나중에 "어느새!"라는 탄성과 함께 이미 이루어진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사랑의 낭비꾼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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