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은 각각 구약과 신약의 골자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모세가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구세사를 요약해 들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그동안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신 일들, 곧 백성의 선택과 파스카 사건, 시나이 계약의 골자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분께서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신명 4,37)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관계의 이유를 "사랑"이라고 밝힙니다. 이유는 그들이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손 내미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 사랑에 철저히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신명 4,35)
이는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 업적들의 목적이고, 그 업적에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목적입니다. 바로 주님이 하느님이시고 다른 신이 없다는 진리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에 약속된 가나안 땅에는 풍요와 번영의 신들이 섬김을 받고 있었지요.
긴 노예살이에서 뛰쳐나와 척박한 광야를 사십 년이나 헤맨 이스라엘에게 부와 다산, 안정과 풍요를 보장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신의 존재는 큰 매력이 될 것입니다. 떨쳐내기 힘든 유혹거리란 뜻입니다.
신명기와 신명기계 문헌들은 이스라엘이 역사 안에서 겪게되는 흥망성쇠의 원인을 이 목적에 비추어 해석합니다.
즉, 우상을 척결하고 하느님만을 섬기던 시기에는 축복을 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느님 아닌 이웃 나라의 군사력에 기대려 기웃거리던 시기에는 멸망의 화를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선포된 내용, 즉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이유와 목적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대대로 되새기고 실행해야 할 정신의 골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 뒤(마태 16,21-23),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십자가!
이것이 곧 신약의 골자입니다. 사실 고대에 십자가형은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하고 치욕스런 형벌이어서 십자가 자체는 모두가 불쾌하고 두려워 꺼리는 도구였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발언은 당시 제자들이 지닌 인식에 균열을 내는 도전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이처럼 공생활 중 몇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 십자가 언급은 후일 스승이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의 충격을 준비하는 과정이 되기도 하겠지요.
예수님은 당신이 앞서 가실 길을 미리 알려 주신 겁니다. 스승의 길,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은 이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생생하고 구체적인 현실입니다. 제자는 스승이 하신 바를 따라가는 존재이기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지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예수님은 목숨을 바치실 것입니다. 지식과 정보 중심의 사회에서는, 일단 던져놓고 보는 말의 홍수가 증명하듯, 삶이 배제된 앎, 실천이 결여된 이론, 모범이 결여된 가르침이 영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진정한 스승이라면 스스로 행하지 않을 것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후일,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1코린 1,23)이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1코린 1,23)한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나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다"(갈라 6,14)는 고백을 낳았고, 세기를 지나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되도록 영혼을 두드립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 모두는 저마다 제 십자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매순간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다른 하느님이 없다는 걸 깨달으라고, 선택하라고, 행동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만만하게 너끈히 질만 하다면 그건 엄밀한 의미에서 십자가가 아닐 겁니다.
그걸 받아안고 걸머지기까지의 망설임과 두려움, 의혹이 있고, 지는 순간부터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며, 속에서 '내던져 버리느냐 버텨 보느냐'의 갈등이 팽팽히 맞선다면 그건 자기 십자가일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기꺼이 받아졌건 억지로 지워졌건 고통을 참아받으며 꾸역꾸역 가다보면, 저만치 당신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시는 스승의 뒷자락이 보이고, "너는 나를 닮았구나" 하시는 반가운 음성이 들릴 겁니다.
그렇다면 제 십자가를 지고 제대로 스승 뒤를 쫓아 가고 있는 겁니다.
좀 경박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삶을 한 판 게임으로 비유해 본다면, 이 게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에 응답해 게임에 뛰어든 우리는 세상의 제물, 권력, 명성, 자기 안위 등의 이기적 욕망과 유혹을 시시각각 물리치며 하느님께 향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이 게임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버팀목이 곧 십자가입니다.
또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나침반도 십자가고요. 힘겹고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우리에게는 끝까지 견딜만한 희망이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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