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들은 하느님께 바쳐야 할 의무들을 상기시킵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신명 10,12-13)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구되는 건, 곧 "경외심, 따름, 사랑, 섬김, 계명 준수"입니다. 이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면서 이스라엘에게만 "마음을 주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하신"(신명 10,15) 하느님께 응당 드려야 하는 응답입니다.
이집트 탈출 때 하느님의 권능과 돌보심을 생생히 체험한 그들로서는 당연한 의무일 겁니다.
복음은 성전세를 언급합니다. 마침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로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마태 17,22)는 대목 뒤에 바로 이어서 성전세 납부 요구가 이어지니 다소 긴장감을 유발시키지요.
베드로가 스승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서둘러 "내십니다"(마태 17,25)고 답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먼제받는 것이다."(마태 17,26)
예수님은, 세상의 어느 임금도 제 자녀에게서 세금을 거두지 않듯, 하느님의 아들이며 성전 자체이신 당신께는 성전세를 납부할 의무가 없다는 걸 명백히 하시지요 다만,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마태 17,27)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오기 전에 섣부르게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실 필요가 없음을 아시기에, 그것이 하느님 앞에 별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당장의 제도적 요구를 수용하십니다.
그리고 그 세금은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동전으로 지불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셈이지요.
성전세는 성전을 유지, 보수, 관리하기 위해 걷는 세금입니다.
이는 집회와 경신례, 각종 축제와 제사 때마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의 수급을 위해서, 또 사제 계급을 비롯한 레위인들, 성전에 기대어 권위와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는 종교 지배층들을 위해 사용되었지요.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와 성전세로 내는 화폐가 달라서 환전 과정에서 차익이 발생했고 이를 불의하게 착복하는 무리도 존재했고요.
그러니 이런 부정이 거리낌없이 벌어지고 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신 것은 괜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요한 2,13-22)
어쩌면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느라 다할 수 없는 의무를 성전세를 통해 레위인들,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임하는 구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는 때 맞춰 축제를 준비하고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올리고 성전을 보살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아무리 성전세를 내더라도 결코 면제될 수 없는 의무가 존재합니다.
바로 오늘 독서에서 모세의 입을 통해 전달된 의무들, 즉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경외심, 따름, 사랑, 섬김, 계명 준수" 등이지요. 이는 유형의 물적 금전적 봉헌으로 대체될 수 없는 영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마음 없이 잣대를 들이대어 힘 없는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든 탓에 예수님의 꾸지람을 들은 율법주의, 문자주의의 맹점이 이를 간과한 결과물이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께 우리가 진정으로 바쳐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사랑입니다.
사랑은 백만금, 억만금으로도 대납할 수 없는 진정한 의무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가 지닌 아름다운 특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나누는 열렬한 사랑은 영혼 안에 갇혀 있지 못합니다. 불길은 어떻게든 번져나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벗님, 오늘 하느님께서 모세의 입을 통해 고아, 과부, 이방인으로 대변되는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이들의 보호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들의 보호자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마음이 혼자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연민의 사랑입니다.
벗님,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바쳐야 할 성전세, 하느님의 거처이며 성전인 우리 영혼을 위해 바쳐야 할 의무는 우선 무엇보다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입니다. 모세가 전한 "경외심, 따름, 사랑, 섬김, 계명 준수"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연스레 이웃 사랑으로 번질 겁니다. 우리는 다만 그 불길을 막지 말고 사랑이 하느님의 보물을 찾아 타오르도록 길을 터주면 됩니다.
설령 우리 자신이 외적으로 볼품없고 흠투성이인 초라한 성전일망정 이렇게 봉헌한 제사는 주님께 영과 진리 안에서 바치는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제사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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