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8.13.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dariaofs 2019. 8. 13. 05:18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제자들의 관심사입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서로 논쟁하던(마르 9,33-37) 질문의 배경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로 바뀌었을 뿐이지요. 아무리 포장을 해도 질문에는 관심사가, 관심사에는 욕망이 깔려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곁에 머물기는 하지만 세상 물이 빠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신 말씀입니다. 세상적 사고에 철저히 역행하는 의미지요. 능력도 쓸모도 아직 미완의 상태인 어린이에게서 주님은 무엇을 보신 걸까요?

제1독서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통수권을 넘기는 장면입니다. 고령의 나이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모세는 모든 지휘권을 여호수아에게 이양합니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신명 31,6.7)


모세는 이 말을 한 번은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번은 여호수아에게 합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힘과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동안 믿고 의지해 온 지도자 모세와의 이별은 마치 광야 한복판에서 고아가 된 듯한 두려움으로 덮쳐왔을 겁니다. 그동안 불평을 할 때도 있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모세의 중재로 얼마나 크고 많은 위기를 넘겨 왔는지 백성은 모르지 않습니다.


아직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고, 그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이민족들을 내몰지도 못한, 정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상태인데, 믿고 의지해 온, 아버지 같은 존재를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네 앞에 서서 가시고 너와 함께 계시며 너를 버려두지도 저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니."(신명 31,8)


모세는 젊을 때부터 자기 시종으로 일하며 만남의 천막을 지켜온 여호수아에게 하느님께서 어떻게 동행해 주실지 구체적으로 알려 줍니다. 이 역시 지금 여호수아에게 가장 필요한 약속일 겁니다.

"너는 두려워해서도 낙심해서도 안 된다."(신명 31,8)


힘과 용기를 내라는 격려는 어느새 금지 명령으로 바뀝니다. 그만큼 강세를 두려는 뜻 같습니다.


누구도 두려움과 낙심을 자청해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자칫 한 번 빠지면 자기 힘으로 쉽사리 헤어나오기 어려운 감정인 것도 사실이지요. 그런데 모세는 단호히 이를 금지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앞서 가 주시고 동행하시는 이, 절대 버려두지도 저버리지도 않으실 이는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건 하느님 현존과 동행을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이"는 곁에서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지 않으면, 앞장서 가주고 함께하지 않으면, 버려두거나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심어 주지 않으면 곧 무너져버릴 약하디 약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바로 모세와의 이별을 앞둔 이스라엘과 같은, 얼마 후 스승을 잃고 황망함과 두려움에 떨 제자들 같은 존재들 말입니다.


결국 "어린이"는 전적으로 누군가의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이를 가리킵니다. 바로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스라엘이고,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 철저히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 홀로 그를 인도하시니 그 곁에 낯선 신은 하나도 없었다."(화답송)


어린이는 잔머리를 굴려 하느님 외에 다른 차선책을 강구해 놓을 줄 모릅니다. 정 그분으로 만족이 안 되면 그 다음으로 찾아가 졸라댈 우상들을 줄세우지도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신 바알에 눈을 돌리거나, 하느님께 여쭙기보다 이웃 나라의 힘에 의지해 난관을 타파하려 할 때마다 그들은 "어린이"의 지위를 상실하고 주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사실 복잡하고 불안한 미래를 향해 가는 우리도 지지기반을 다져놓고 뭔가를 비축해놓는 일에 삶의 대부분을 바치고 살지 않나 성찰해 봅니다.


벗님은 어떠신가요? 재산, 인맥, 보험과 자격증, 권력, 제도, 신분 그리고 어쩌면 종교까지도 사후세계용 보험증서처럼 꾸며놓고 하느님 없이도 끄떡없이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데 골몰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아쉽지만 우리 안에 "어린이"는 없는 겁니다.

"어린이"가 아니기 위해 노력해 온 삶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뒤집히기는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아직 "어린이"가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이 에고로 무장해 주님의 손가락이 들어 올 틈새조차 없는 우리의 경직된 영혼이 차츰 어린이처럼 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잘난 척, 씩씩한 척, 꿋꿋한 척은 하지만 저마다 남 모르는 아픔과 외로움, 두려움을 안고 사는 우리를 결코 업신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뛸 듯 기뻐하며 달려오셔서 우리 곁을 지켜 주십니다.


당신 손길이 더 필요한 작고 약하고 볼품없는 우리를 더 반기시지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가 보여 준, 세상 통념을 뒤집는 비경제적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삶에서 그동안 지탱해 준 손을 놓아야 하는 시간, 이끌어 준 힘을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 모든 꿈이 무너졌는데 약속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 올 겁니다.


광야 한가운데서 빈 하늘을 이고 두려움에 떨며 작은 점처럼 나뒹굴게 될 때, 정말 힘들겠지만, 주저하지 말고 더, 진짜, 참된 "어린이"가 되려고 애써봅시다.


그 순간이 하느님만이 위로와 힘과 용기가 되시는 은총의 때로 탈바꿈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어린이"(벗님)를 결코 "버려두지도 저버리지도 않으실 것"(신명 31,8)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