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들은 제게 관계 이야기로 들립니다. 복음에서는 한 아버지의 자녀로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독서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가능한 최고의 관계를 모세라는 한 인간을 특정해 열어줍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오늘 말씀의 전제입니다. 서로 잘 맞을 때야 한없이 좋을 수 있는 게 인간관계지만,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게 되면 말이 달라집니다. 상해의 정도와 형태는 달라도 당한 쪽에서는 서운함은 물론 배신감과 분노, 슬픔, 복수심까지도 치밀어오를 수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권유는 절차가 꽤 복잡합니다. 먼저 그를 직접 타이르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하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안 들으면 교회에 알리고, 마지막으로 교회 말도 안 들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시네요. '취급하라, 대하라'가 아니라 '여겨라'입니다. 한 사람의 회심과 구원을 위한 절차는 최대한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심정적으로든 관계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누군가를 포기하거나 제외시키는 일은 가급적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혹여 부득이한 경우에라도 편중된 일부의 의견만이 작용해서는 안 되기에 더 마음을 써야 하지요.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그런데 이 최종 결론에 작은 반전이 숨어 있다는 걸 눈치 채셨는지요? 사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를 사랑하고 포용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예수님께서 몸소 그들을 찾아가 함께하시는 건 이스라엘 백성들 저변에 깔린 배타적 민족주의와 율법주의를 향해 던지는 고요하고도 심지 굳은 도전장과 다른지 않습니다.
결국 끝까지 (징하게) 형제와 교회의 권고를 듣지 않는 이라도 아버지께서 품으시는 한 형제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미 구약의 예언서 갈피마다 온 세상에서 모여든 이민족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이 드러나 있고, 또 예수님께서도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예고하신 바 있으니까요.
그러니 참다 참다 못 참겠거든 마지막으로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에는, 인간적으로는 힘들겠지만 주님도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하지 않으시니 함께 기다려 주자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이는 일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뒤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라는 걸(마태 16,19)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때는 베드로에게만 국한해 하신 말씀을 오늘은 제자들 전부에게 전하시네요. 매고 푸는 권한, 즉 단죄와 용서, 해방의 권한이 제자단으로 확대된 셈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 부활 이후 성령을 받은 모든 이들에게로 전격 확장될 것입니다.(요한 20,23) 바로 우리 모두의 권한이자 의무가 된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마태 18,19)
두 사람 이상이 모이기 시작하면 인간 관계에서는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는 걸 우리 모두는 체험으로 압니다.
나빠서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마음을 모으는 과정에서 자기의 것과 타인의 것을 조율하다보면 긴장과 갈등이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이 어려움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러면서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 실존을 또한 통찰하고 계시기에 꽤 매력적인 보상을 제시하십니다. "마음 모아 청하면 들어 주신다는 것, 당신이 함께 있겠다는 약속"(마태 18,19-20 참조)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단락의 내용은 모두, 본문 범위 안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전체 문맥으로 보아, 뒤에 이어질 용서의 주제(마태 18,21-22 참조)를 향해가고 있습니다.
곧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곧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말씀을 위한 전주곡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우리 인간은 저마다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라서, 함께 하는 삶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갖가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몰랐다면 다른 문제지만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상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 포용과 자비 외에 다른 해답은 주지 않으십니다.
부부건, 가족이건, 공동체건 불가능하기 짝이 없는 이상화된 관계만 꿈꾸다 보면 이상적 존재가 아닌 나와 그를 동시에 피곤하게 하고, 결국 요구와 실망으로 관계의 틈을 벌어지게 만들 뿐이지요.
그 속에 용서가 없다면 상처와 회피의 쳇바퀴가 계속 돌면서 눈두덩이처럼 커져갈 뿐 합치점은 점점 멀어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죽음을 다룹니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이만한 관계성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큰 희망과 행복을 주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이 묵상을 나누는 분들 안에도 이미 이렇게 주님과 살아가는 분도 계실 수 있겠지요.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신명 34,5)
혹시 벗님에게는 이 말씀이 모세의 삶이 헛수고와 공허로 매듭지어진 실패로 느껴지십니까? 그토록 간난고초를 겪으며 도달한 약속의 땅에 결국 발조차 들여놓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말입니다.
이 조처가 마치 징벌처럼 내려졌으니(민수 20,12 참조) 그럴 만도 합니다. 또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상황에서 모세 대신 주님께 서운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시각에서 이 죽음을 관상하면 영 다른 광경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신명 34,10)는 신명기 저자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모세는 이미 이 지상에서 하느님과 더할 수 없이 친밀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그 사랑의 관계를 본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럽기 짝이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지요.
혹시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칩시다.
"모세야, 너 지금 하늘 나라에 와서 나와의 영원한 사랑 안으로 들어올래? 아니면 거기서 좀 더 머물며 약속의 땅 점령 싸움을 시작할래?"
벗님이라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저는 모세가 억지로 질질 끌려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듯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허락만 하신다면 모세처럼 얼른 하느님 품으로 뛰어들고 싶습니다.
하느님과 이 지상에서 그처럼 일치의 은총을 누린 모세에게 천상의 초대 앞에서 지상의 땅 따먹기는 어쩌면 더이상 대수롭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약속의 땅은 사실 우리에게 약속된 천상 본향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모세는 살인죄까지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이 지상의 광야 길을 걷는 동안 하느님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친밀함을 희망으로 선사 받았습니다. 무수한 성인성녀들 역시 그 희망으로 더더욱 주님께 달아들었을 것이고요.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에게도 그처럼 겸손히 손을 내미시고 곁을 내주시고 속을 보여주시는데, 그분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지, 오늘 말씀이 던지는 질문의 답은 우리 각자 안에 있습니다.
"주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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