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8.16.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dariaofs 2019. 8. 16. 05:56



모세가 먼저일까요, 하느님이 먼저일까요? 너무 뻔하고 불경스럽기까지한 질문처럼 들리겠지만 오늘 말씀들에서는 모세와 하느님 사이의 질서 찾기가 시도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 던진 질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들 중 어떤 것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과 합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를 올가미 삼아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잡으려 하는 겁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하고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는 이들의 친구인 예수님께서 그들의 편을 드는 것이 영 못마땅한 것 같습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마태 19,4-5)


예수님은 이처럼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시고,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마태 19,7) 바리사이들은 이처럼 모세를 앞세웁니다. "명령"이라고 슬쩍 과장까지 하면서요.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마태 19,8)


다시 예수님은 "처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질서 지워 주실 때의 그 뜻을 생각하라고, 모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희 마음이 완고하게 굳어서일 뿐이니, 모든 이들에게 일반화시켜 적용할 일은 아니라고 재차 인내롭게 초대를 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19,9)


바리사이들이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방패 삼아 붙잡고 늘어지는 모세라는 중개자를 뛰어 넘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고 직접 선포하신 겁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으로서, 전달자와 무수한 해석자들을 거치면서 일부의 편의대로 굴절되고 모호해져 버린 율법 본래의 정신을 바로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잘 아시기에 혼인관계가 한 쪽, 주로 기득권층인 남성의 취향이나 변심, 욕정으로 무너지는 세태를 안타깝게 여기신 듯합니다.


그래도 "불륜"의 경우는 예외를 두셨는데요, 사실 구약 예언서들에 드러난 "불륜"이라는 단어는 신부인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하느님 외의 다른 이방신을 섬기거나 외세의 힘에 기댈 때, 즉 혼인관계로 표현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더럽혀지고 오염되었을 때 쓰는 표현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이 "불륜"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하셨을까요? 물론 당장의 꾸짖음과 징벌이 없지 않았지만, 울부짖는 백성의 고통을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없으셔서, 거시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응답은 결국 용서였습니다.


오히려 불륜의 자취를 말끔히 씻어 주시고 진홍같이 붉은 죄를 눈같이 희게 해 주셨지요.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인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크기와 깊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 19,10)


그런데 이 가르침이 이번에는 제자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자의건 타의건 이미 율법과 관습에 익숙해 있었으니까요.


불륜의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에게 이혼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면 혼인이 별 의미가 없지 않겠느냐는 볼멘 소리입니다.


이 말을 통해 사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꿈꾸셨던 하느님의 원뜻이 얼마나 변질이 되었는지 감지할 수 있지요. 그러니 예수님은 이 모두를 상대로 하느님의 사랑의 정신을 다시 일깨우셔야 했습니다.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독신이 흔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굳이 혼인하지 않겠다면 제 편의나 권리 행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 나라"를 위해서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건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마태 19,11)고 하시면서요.

세상 일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모든 하느님의 일에는 더더욱 바른 동기와 바른 지향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거나 착취하려 혼인을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혼인하지 않는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 인생을 걸고 응답해야 하는 귀한 성소니까요.

제1독서는 여호수아기 뒷부분에 해당됩니다. 약속의 땅 정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뒤 여호수아가 스켐에 집회를 열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모아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여호 24,3) 관계를 맺으신" 부르심의 시작부터",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파스카 여정, 가나안 정복 전쟁의 과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선포됩니다. 이스라엘 구원 역사의 요약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전체 내용의 주어인 "나"가 하느님이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모든 업적과 놀라운 일을 이루신 분은 모세도 여호수아도 아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눈에 드러나는 현상과 앞장서 일을 하는 사람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과 일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여호수아가 하느님의 일인칭 고백을 전달하며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섭리, 그분 계획에 따라 질서 지어졌고 진행되는 중입니다.

이 기나긴 역사의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은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여호 24,13)


척박한 광야를 지나서 풍요로운 결실을 손에 넣은 이스라엘의 기쁨과, 이 모두를 베풀고 뿌듯해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신랑이신 하느님께 맞갖는 충실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살아가도록 몸과 마음, 결심과 맹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복음의 혼인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봅니다. 혼인 생활의 어려움들은 몇 가지 사안만으로 카테고리화 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복잡할 겁니다. 다양성의 충돌이니 그럴 수 밖에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십니다.


감정적이었든 호르몬에 의한 것이었든 처음 불꽃이 튀었을 때의 사랑,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관계를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불어넣으신 사랑이 서로에게 끝까지 충실히 베풀어지길 바라시는 겁니다.

오늘 독서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 직접 가꾸지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 열매"가 우리에게도 몽땅 무상으로 주어진다면 어떨까요?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것처럼 엄청난 횡재를 한 셈이니,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몹시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하겠지요.


이스라엘은 오랜 역사의 굴곡을 지나 이처럼 커다란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선물에 얼마나 감사하며 주님께 충실했는지 앞으로 우리가 만날 성경 말씀이 알려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겐 서로의 배우자가 그런 존재가 아닐까요? 내가 낳아 키우지 않았고 공들여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 어찌어찌하시다가 부족한 나에게 보내 주신 선물 말입니다.


혼인한 사람들은 인간적 사랑과 안정감을 채워줄 짝꿍을 하느님의 그런 선물로 여기고 감사하며 충실히 사랑해 준다면,


하늘 나라 때문에 독신을 선택한 이들은 영원한 짝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충실히 섬긴다면, 우리는 저마다 약속의 땅에서 충만하고 행복한 은총과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교회,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혼인관계를 맺은 신부랍니다.


설령 혼인생활의 상처를 가진 분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취가 교회 안에서 움츠리거나 낙심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랑이신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와 충실성으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는 말씀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을 주님은 진정으로 기뻐하실 겁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