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8.18. 연중 제20주일 - 오상선 바오로 신부

dariaofs 2019. 8. 18. 05:39



연중 제20주일 말씀에서는 다소 강한 어조의 예수님 목소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두 개의 독서가 봉독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불은 참으로 다양한 표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은 덥혀주고 따뜻함을 유지해 줍니다. 불은 소독하고 정화하며 불순물을 걸러줍니다. 불은 태워 없애고 파괴하고 잿더미를 만듭니다.


또 불은 하느님의 진노를 드러내고(창세 19,24; 묵시 16,8), 하느님 현존과 영광을 드러냅니다.(창세 15,17; 탈출 3,2) 또 불은 사랑인 동시에, 사랑이신 하느님이십니다.(아가 8,6-7)

"그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스라엘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불을 충분히 경험해 왔기에 사실 그들에게 불은 생소한 표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은 여전히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며, 하느님의 불에 자신을 내어맡기기보다 세상 원리와 손잡기를 즐겨합니다.


그래서 충분히 타오르고도 남았을 터인데도 아직 타오르지 않은 불을 아쉬워하십니다. 그 불이 타올랐다면 아마 이스라엘은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니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불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의 불이시고,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살라 바치는 불이십니다.


미움과 절망으로 얼어붙어 굳어버린 마음들을 녹이는 불이시고, 질병과 고통과 눈물을 치유하는 불이시며, 남녀노소, 자국민과 이방인, 주인과 노예, 종교들을 가르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불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미 불이시니, 곁에 있는 이는 옮겨붙거나 멀리 피하거나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열정에 압도되어 그 불덩이가 옮겨붙도록 허용한 이는 먼저 그 불로 자신 안의 불순물들이 타고 정화되는 고통의 시간을 겪어내어야 합니다. 어느 성인의 비유에서 보듯, 습기 찬 나무둥치에 불이 붙으면 처음에 악취와 연기를 내뿜습니다.


그렇게 자신도 아프고 주변도 괴로운 정화의 시간을 거쳐야 하지요. 그 기간을 견뎌내며 잘 건조된 나무둥치가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키ㅣ 12,51)


예수님의 불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맞서고 갈라지게 합니다. 불로 정화된 영혼과, 멀찌감치 떨어져 불구경만 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무늬로만 제자의 타이틀을 지닌 이와, 사랑의 불이 자신을 태워 사랑이 되어버린 제자 사이에는 갈등이 불가피합니다. 사랑의 불이 되어버린 이는 더 이상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두루뭉실하고 안일한 편안함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여기서는 맞서고 갈라지는 대상들을 가족 구성원의 예로 말씀하셨지만, 그 대상은 우리 내면에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스스로가 불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안정제일주의와 보호본능, 적정선을 지키는 데 무절제한 충동과 자극, 결과에 대한 우울과 불안, 편협하고 무질서한 자기애 등 한 인격 안에 자리하는 여러 모습들이 맞서고 갈라질 것입니다.


이 역시 혼란스럽고 아프지만 질서와 조화를 찾아가는 여정이고 궁극의 평화를 향해 있습니다.

내면에서든 외부 관계에서든, 아프지만 맞서고 갈라지고 성찰하고 화해하면서 서로에게 불을 지펴주고 꺼지지 않게 돌봐주는 사이, 매캐한 악취와 연기를 지나 평화는 옵니다. 순탄하다 못해 나른하기까지 한 상태는 편안 정도이지 평화는 아닙니다.

불이신 예수님 곁에서 불이 옮겨붙은 이는 이내 예수님과 한 덩어리의 불이 됩니다. 불을 둘로 가를 수 없듯 이미 두 존재는 하나의 불길입니다. 그렇게 커진 불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현존을 더 크고 더 밝게 더 뜨겁고 더 맹렬하게 드러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레미야의 곤경을 다룹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점령당하리라고 진실을 전한 탓에 물 없고 진흙만 있는 저수 동굴에 내려져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불길에 휩싸여 하느님의 뜻을 진실되게 전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예언자의 전형입니다. 이 모습은 곧 예수님께도 겪으셔야 할 고난의 모습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고 나서긴 했지만 내외적 관계 안에서 맞서고 갈라지고 짓눌리고 분열되다 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선하신 주님을 따른다면서 서로 맞서고 갈라지는 걸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두루두루 좋고 편안하게 사는 게 하느님 뜻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 비슷한 일침을 가합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3-4)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의 불이 되어 타오른다는 것은 고난이든 영광이든 주님과 한 몸이 되어 헤쳐나가겠다는 의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권고대로, 십자가를 견디어내신 분이 우리 앞에 계시니 우리는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우리는 이미 주님과 한 불이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그 사랑의 불에 휩싸인 벗님의 열정적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