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한 젊은이가 다가와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여쭙고 싶은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미 그 젊은이는 제 안에 대략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답입니다.
다만 자신이 매우 잘 실천하는 계명들 외에 뭐가 더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킬 것 다 지키며 열심히 살지만, 과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갈망을 동시에 감지했기 때문이겠지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예수님께서 젊은이에게 지켜야 할 계명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을 하지 말고, 부모님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조항들을 나열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그가 다 잘 지키는 것들입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젊은이는 그 정도라면 자신이 있습니다. 잘 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았으니 만족스러울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불안과 갈망이 더 커져갑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걸 다 잘 하고 있는데도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직 미진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서 모세를 통해 받은 열 개의 계명 중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건 쏙 빼시고,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것들만 말씀하신 겁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하느님과의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걸까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마태 19,21)
예수님께서 살며시 그의 허를 찌르십니다. 젊은이의 욕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겉으로 표현은 되었으나 실상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루 다 잘 하고 두루 잘 갖춘 괜찮은 사람으로도 모자라 완전해지고 싶은 겁니다.
또 그 완전함을 확인받고 싶기도 하고요. 지상에서 나름 훌륭히 사는 삶은 사후에 영원한 생명까지 얻어야 완전함의 방점이 찍히겠지요.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완전한 사람이 되는 충족 요건 중 하나에 불과했던 걸까요?
그런데 사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지상 삶에서는 물론 사후에까지 그분 곁에서 영원히 그 사랑을 누리고 싶을 때 갈망하게 되는 겁니다. 지옥 가서 벌 안받으려고 반대급부로 바라게 되는 보상적 공간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예수님께서 갑자기 재산 처분 이야기를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그러셨을까요? 워낙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는 분이시니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도 않겠지만, 지금 맥락에선 좀 뚱딴지같지요.
오늘의 주제가 가난한 이들을 도우라는 쪽으로 흘러가는 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심층으로 들어가면 부자 청년에게 던진 예수님의 결정적 요구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라는 권고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까 예수님께서 젊은이에게 지켜야 할 계명들을 나열하셨을 때 건너뛰신 부분, 즉 하느님 사랑과 관련된 부분이 "버림과 따름"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너도 가난해질 수 있겠느냐? 가난해지면 하느님밖에 믿고 의지할 데가 없을텐데 그렇게 온전히 의탁할 수 있겠느냐?
너는 아직 젊은데, 남은 길고 창창한 생애 동안 그렇게 하느님을 믿고 너를 던질수 있겠느냐?" 즉,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사랑하고 흠숭하며 바라는 삶으로의 초대였던 것입니다.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2)
안타깝게도 부자 청년의 세속적 이점인 "부유함"은 주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됩니다. 그가 흔쾌히 "부"를 포기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부"는 그에게 이점인 동시에 굴레였습니다.
자신의 "부"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사람같지만 실상은 "부"에 묶인 예속 상태, 노예 상태인 것이지요. 이미 젊은이에게는 재물이 포기할 수 없는 우상이 된 것입니다. 완전함을 획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우상!
제1독서는 판관기의 앞부분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염려하셨던 대로 우상에 빠져듭니다.
하느님과 우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가나안 정착 초기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우상숭배 --> 주님의 진노 --> 재앙과 곤경 --> 백성의 탄식 --> 가엾이 여기시고 구원 --> 또 다시 우상숭배 ...이 도식은 지치지 않고 반복됩니다.
"그래도"(화답송) 용서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주님과 "그런데도"(판관 2,17) 다시 불륜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의 밀당은 그들만의 문제일까요?
오늘 부자 청년이 드러내놓고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재물에 발이 묶여 결정적인 한 걸음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서는 걸 우리 모두 안타깝게 지켜보았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을 섬기는 삶으로의 초대는 이처럼 각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 뛰어난 부분,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것 같은, 영혼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며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영원한 삶, 그토록 사랑하는 성삼위 하느님 사랑 안에 들어가 영원토록 얼굴을 마주하며 즐기는 삶은 사후에 갑자기 시작되지 않을 겁니다.
지상의 여정을 걷는 동안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머무르며 자신을 온전히 그분 품 안에 내던지고 의탁해 형성된 끈끈하고 친밀한 일치가, 그동안 충실히 실천해온 "선한 일"들과 엮어지면서 이미 체험한 생명이 영원히 연장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주님 뜻에 따라 실천하고 있는 "선한 일"들에 색채와 온기를 더할 결정적 한 걸음, 저마다의 "재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부르심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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