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밭 임자에 비유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와 일꾼들을 직접 찾아나서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존재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하루에 다섯 차례나(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시, 오후 다섯 시) 인력시장이 있는 장터에 나갑니다. 이쯤 되면 일을 얻으려 나온 사람들 버금가는 정성입니다.
그렇다고 포도밭에 일이 넘치고 일손은 부족해서 조바심 치는 게 아닙니다. 그랬다면 애초 이른 아침에 더 많은 수의 일꾼들을 뽑아갔으면 되었을 테니까요. 하늘 나라의 수고는 일하고 싶어하는 이들과, 그들의 일들이 있는 한 계속됩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하늘 나라, 곧 하느님은 사랑의 의지이고 자애를 베풀려는 열망입니다. 당신을 바라는 이들을 당신 나라에 참여시키고 싶어하는 허용성이고, 갈망하는 이는 누구도 가리지 않는 관대함입니다.
특히 온종일 오늘 하루도 공칠까 불안과 절망으로 떨며 기다린 이들의 마음의 노고까지 헤아리는 자애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공정성이고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더 일하고도 덜 일한 이들과 동일한 품삯을 받은 이들이 투덜댑니다. 그들은 애초에 대가를 합의했다는 사실은 잊고, 나보다 덜 고생한 이와 자기가 같은 보상을 받은 것이 못마땅합니다.
이처럼 비교가 끼어드니 처음 동의했던 품삯에 대한 만족감이나 선택되었을 때의 감사는 희미해집니다.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에 몰입하기보다 타인과 하느님의 관계에 더 관심이 쏠립니다. 비교의식은 만족과 감사의 질을 떨어뜨리게 마련입니다.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더 가지려는 욕망이 좌절되자 그 욕망을 공정성으로 포장해 항변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늘 나라의 공정성이란 하느님 마음에 달린 일입니다.
더, 더, 더 사랑하려는 하느님의 의지가 곧 그분의 공의로움으로 표현되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의 논리인 사랑은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각자에게 맞는 사랑의 종류와 수량, 방식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늘 나라에 참여하길 꿈꾸는 이들은 마음의 논리도 변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물질적으로 더 받고 더 소유하고 더 누리는 삶이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대가에 집중하면 참여 자체가 주는 은혜로움을 놓치게 되고, 남이 받은 은총을 힐끔거리다 마음의 풍요를 잃을 수 있습니다. 남보다 더 받지 못해 슬퍼하는 것으로 하루종일 하늘 나라에 참여한 행복을 잃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제1독서는 판관 기드온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자리 다툼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21,25)라는 판관기 마지막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이스라엘에는 왕정 제도가 서지 않았고 고난을 겪을 때마다 주님께서 세워주신 판관에 의존해 위기를 넘겨갔는데 그러다보니 혼란이 컸지요.
판관 기드온의 아들들 중 하나인 아비멜렉이 스켐 외가의 힘을 빌어 형제들을 살해하고 임금이 되었을 때 막내 요탐만 홀로 살아남습니다.
그가 스켐의 지주들을 향해 외친 이 비유에는, 훗날 하느님의 다스림보다 임금의 다스림을 선택했던 이스라엘의 미래가 담겨 있고 권력과 이권 놀음으로 변질될 "다스림"의 폐혜가 암시됩니다.
신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과 세상에 유익을 주는 올리브, 무화과, 포도의 생산 주체들은 자기를 다른 존재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받은 은혜와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며 오롯이 소명에 충실하길 원할 뿐 권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지요.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 삼켜 버리리라."(판관 9,15)
오히려 가시나무는 미약한 자기 인식과 공격성으로 임금의 자리를 탐냅니다. 임금을 원한 나무들은 풍성하고 싱그러운 잎이 드리워준 그늘 밑이 아니라 메마르고 거친 가시나무 줄기들의 빈한한 그늘로 몸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인간의 다스림을 선택할 이스라엘이 아프게 겪으며 갚아나가게 될 권력의 뒤안길에는 하늘 나라의 논리 대신 세상의 논리가 들어차게 될 것입니다.
"꼴찌가 첫째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른 아침부터 뽑혀 신나게 수고하며 하늘 나라에 참여했다는 뿌듯함에, 타인에게 쏟아지는 하느님의 후한 사랑을 함께 축복하는 기쁨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의 논리에 훨씬 가깝게 있는 겁니다.
비록 세상에서 크게 한 자리 차지하지 못해도 이 감사와 행복만으로 하느님 안에서는 충분히 첫째입니다. 주인의 선한 다스림에 만족하는 사이 어느새 주인의 관대함을 닮아가고 있으니까요.
늦었다 생각하지 말고, 오늘부터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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