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8.17.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dariaofs 2019. 8. 17. 05:13


오늘의 말씀들에서는 자격이 대두됩니다. 복음은 하늘 나라를 소유할 자격을, 제1독서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에 살 자격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마태 19,13)


자기 자녀에게 좋은 걸 주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자기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길 청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제자들 보기에 탐탁치 않았나 봅니다.


어른들을 상대해 명성과 지지를 얻기에도 모자랄 판에 보잘것없는 애들에게까지 신경 쓸 틈이 어디 있겠느냐고 여겼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예수님의 눈길과 손길, 사랑을 받고 싶어 다가오는 어린이들을 떠올립니다. 기대에 찬 눈빛이 얼마나 순수하고 천진한지요. 그들이 바라는 건 단지 축복입니다.


세상의 때가 묻은 이들이 은근히 바라는 돈이나 자리, 기적 따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을 얻는 "기도"지요.

어린이는 가진 것도, 힘도 없고 자주성도 보장받지 못한 존재지만 자기를 환대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이내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끌려 계산 없이 달려가지요. 하늘 나라는 그런 이들의 것입니다.


저만치 멈춰서서 하늘 나라의 축복과 자기가 소유한 것을 저울질하며 망설이고 있다면 아직 하늘 나라는 그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 장면 중, 아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들이미는 부모들이나 예수님 앞으로 몰려드는 어린이들, 그리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예수님 모두가 어린이, 철부지들입니다.


축복을 위해 체면도 눈치도 개의치 않고 오직 영혼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들이지요. 그러니 그들은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도" 괜찮습니다. 영혼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이는 길을 잃지 않으니까요.

아쉽게도 이 장면에서 제자들만 어린이가 아닙니다. 아마 시작은 어린이였을 겁니다.


부르심에 응답해 모든 걸 버리고 따라나설 때에는 아무 계산 없이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았을 것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 곁에서 존경도 받고 대접도 받으며 나름 위계질서도 따지다보니 그만 우쭐해져 버렸습니다.


다시 세상 때를 묻히고 "어른"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어린이는 그저 하찮은 존재일 뿐이고, 예수님처럼 중요한 분이 그런 애들과 노닥거리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도록 자기들이 질서를 잡아줘야 한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감히 꾸짖는 이런 이들이 하늘 나라의 주인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자격입니다.

제1독서는 어제와 이어지는 여호수아기의 끝부분입니다. 길고 지난했던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치면서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구를 섬길 것인지"(여호 24,15) 묻습니다.


아브람 때의 "강 건너편" 신, "이집트"의 신,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 그리고 야훼 하느님 중 누구를 섬길지 확실히 정하라고 반복해 요구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도 가감 없이 알려줍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여호 24,16)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8)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여호 24,21)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여호 24,24)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네 차례에 걸쳐 맹세를 합니다.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선언이 곧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약속의 땅에 살 수 있는 그분 백성의 자격입니다.

지금 그들은 흡사 어린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여호수아의 입을 통해 조상들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는 구원 역사를 방금 들으면서 이집트 탈출의 기적과 광야 생활, 약속의 땅 정복의 과정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겁니다.


그들 영혼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심, 사랑으로 뜨거워지고 불타올라 못 할 약속이 없습니다. 모든 걸 바쳐도 아깝지 않은 열정과 충성심으로 가득합니다. 하느님밖에는 누구도 그들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착생활의 풍요와 이방 신들의 유혹 앞에서 순수했던 어린이의 영혼은 계산과 잣대질, 저울질에 익숙해진 "어른"의 영혼으로 변질되어 갈 것입니다.


잇권과 이익을 보장해 줄 것 같은 우상을 향해 돌아서고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힘이 되어 줄 우방을 찾아 기웃거리는 사이 야훼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지겠지요.


그러다 질투하시는 하느님의 진노가 내리면 다시 돌아와서 하느님만 섬기겠다고 맹세할 것이고...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는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어린이" 시절과 우상에 기대는 "어른" 시절의 반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도전과 유혹은 현대를 사는 지금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고요.

어린이 되기.
다시 어린이 되기.
또 다시 어린이 되기.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느님과 함께 걷는 영적 삶에서 이는 생략하거나 건너뛸 수 없는 과정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 혹여 "어른"이 되어 버린(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얼른 되돌아와 "어린이"를 되찾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니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철부지요 어린이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