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일갈을 듣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해 당신의 때를 향해가시는 예수님으로서는 위험천만한 발언입니다.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일으킬수록 주님의 죽음은 더 확연히 실체를 드러낼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예수님의 목소리는 거침 없습니다. 이미 밑바닥을 받아들인 이에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13)
행복과 불행은 당사자 본인이 감정이나 느낌으로 감지하는 상태지, 명령한다고 그리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형태의 어미를 사용하신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깨닫지 못하면서 악을 자행하는 이들을 더욱 강하게 일깨우시려는 의도 같습니다.
그 안에는 "사실 너희는 불행하다, 계속 그렇게 산다면 반드시 너희는 불행해질 것이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하지만 저주의 의미를 담은 단정으로 들리지 않고 내장이 뒤집힐 만큼 안타까움 가득한 호소에 가깝게 들립니다.
소위 백성을 하늘 나라로 이끌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추구하려는 사랑이나 열의 없이 제도적 절차로만 의무를 이행할 때 지도자와 백성은 서로 불행합니다.
지도자는 스스로 하느님(하늘 나라)을 놓아버렸기에 불행하고, 백성은 그 길을 차단 당해 불행합니다. 하지만 백성은 선택권이 없었던 터라 하느님에게서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이나 조직에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려 온 힘을 기울이지만, 정작 개종하게 되면 정신보다 형식을, 본질보다 비본질을 택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도록 이끄는 자도 불행합니다.
사실 정성을 다해 철저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들보다 편법에 능한 형식주의자가 함께하기 훨씬 편하겠지만, 결국 함께 "지옥의 자식들"로 전락할 뿐입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예수님께서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금과 성전, 예물과 제단 중 과연 어느 것이 본질이고 어느 것이 비본질인지 묻고 계십니다.
지금 복음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는 알 것 같은데, 당시의 패러다임에 갇힌 이들은 그 뻔한 정답을 진짜로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 걸까요?
"무엇이 더 중요하냐?"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이 공허하게 허공에서 흩어집니다. 이기심과 편견,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이들에게서는 그냥 튕겨나올 뿐, 도무지 내면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허공을 떠돕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중요하다고 하시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비본질이 본질 자리를 꿰어찬지 오래라서 이 질문 자체가 진작에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신앙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낯선 이방인 바오로와 그 일행을 신뢰해 주님의 길에 들어선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서 복음의 불행 선언과 대조되는 축복을 발견합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희망의 인내"(1테살 1,3)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이러한 덕행은 사도와 그 일행의 "처신"(1테살 1,7)이 맺은 열매입니다.
그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1테살 1,5) 복음은 전했기 때문이며, 새로운 개종자들이 자신들을 능가하는 신앙과 열정으로 살아가길 사심없이 축복하면서 길을 터준 바오로, 실바누스, 티모테오의 진정어린 기도 덕분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위해 주님께 빌어 주는 "은총과 평화"(1테살 1,1)는 과거 예수님께서 기존 유다교의 지도자들에게 안타깝게 외치신 호소에 대한 응답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는 이들은 한 걸음 앞서 가면서 비록 자신이 소멸되더라도 하느님 백성의 성장과 행복을 기뻐할 줄 압니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화답송)
딱 한 걸음 앞서 걷는 이들은 뒤따르는 이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살펴주고 북돋워 주어야 할 소명을 지닙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을 충실히 사랑하면서 이 사랑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아낌없이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그 자리에서 환호"하며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그들에게 이기심이나 자기 영광, 권태나 게으름은 발붙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강 론 말 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9.08.30.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0) | 2019.08.30 |
|---|---|
| 2019.08.29.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 (0) | 2019.08.29 |
| 2019.08.25. 연중 제21주일 - 서광희 신부 (0) | 2019.08.25 |
| 2019.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0) | 2019.08.24 |
| 2019.08.23.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0) | 2019.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