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길을 준비한 충직하고 겸손한 세례자 요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미사 말씀들에서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예레 1,17).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파견하십니다.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는 행동은 준비된 종의 자세이면서 분연히 자기의 소명을 다할 태세를 갖춘 태도입니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입에 담아 주신 말만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 그의 귀와 마음을 거쳐 입으로 선포되지요. 진정한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에 자기 것을 섞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자기가 전한 말씀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겁니다.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세례자 요한의 비극적 죽음을 다룹니다. 이 대목에는 세 부류의 "말하기"가 등장합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말하기"입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마르 6,18).
권력자의 비위를 지적하는 일은 늘 죽음의 위험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외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예언자입니다. 이미 그의 가슴에 하느님의 불덩이가 자리하기에 이를 외면하고 목구멍 아래로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질식해 버리고 말 테니까요.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전하며 칼날이 목에 닿아도 진실을 외칠 때 예언자의 마음은 가장 자유롭고 홀가분합니다. 이 자유로움은 하느님 말씀의 통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증거입니다.
두 번째 "말하기"는 헤로데의 것입니다. 비극적 결말을 초래할 수 있는 속 빈 권력자의 허세 가득하고 경솔한 "말하기"지요.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은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힘을 지닌 자의 가벼움이 초래한 "말하기"는 당장 자기 위신과 체면을 구하려는 만용을 넘어 폭력으로 변질됩니다. 그 결과는 예언자의 죽음, 하느님 말씀의 죽음이지요.
세 번째 말하기는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살로메의 "말하기"입니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 청하였다"(마르 6,24-25).
사람을 해치는 죽음의 "말하기", 악이 주도하는 "말하기"입니다. 그녀들은 개인적 원한을 한 의인의 생명으로 되돌려 받고, 역사에 자기들의 부끄러운 이름을 각인합니다.
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이 세 "말하기"를 두루 체험하며 삽니다. 나의 대화에서 어느 "말하기"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은 본인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적 시각에서 비극적 결말을 앞당긴 것으로 보이는 세례자 요한의 "말하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하늘 나라를 소유하는 "말하기"는 오로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께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 임금들 앞에서 당신 법을 말하며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당신 계명을 되새기며 끝없이 사랑하나이다"(입당송).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우리 입과 심장에 담아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올 때 그 말씀을 자기가 미리 판단하지 말고 부끄러움 없이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곧 말씀이신 분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표시지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면서 신약을 준비하고 그 포문을 열어 준 세례자 요한의 존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 무엇을 믿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진지하게 묻습니다.
온갖 거짓과 기만, 자괴감이 뒤엉켜 발효된 "말하기"는 또 다른 악을 양산하거나 한풀이에 그칠 뿐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할 힘이 없습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
하늘 나라를 차지한 세례자 요한의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친히 엄호하시니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지 말고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하루가 되길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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