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9.06.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dariaofs 2019. 9. 6. 04:10



이제 슬슬 종교 지배층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자기들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자기들의 계보에 속하지 않는 모호한 신원도 의혹을 일으키지요. 게다가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런 불확실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기적과 사랑으로 민중의 고통을 직접 어루만지며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 점입니다.


지배와 착취, 단죄가 아닌 공감과 위로, 연대와 포용의 모습으로 말이죠.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비아냥거리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물론 기도와 단식은 자선과 더불어 하느님의 복을 얻을 수 있는 대표적 수행 방식으로 신앙 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진짜로 제자들이 "먹고 마시기만" 했겠습니까만, 율법과 제도의 틀을 수호하고 보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그들에게는 그리 보였을 수도 있을 겁니다.


뒤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루카18,9-14)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은 세세한 조항들을 따져 실행하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루카 5,34).


아무리 종교적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라도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혼인 잔치가 그렇습니다. 혼인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잇고 하느님 백성의 수효를 늘리면서 힘을 키우는 축복입니다.


일례로 신명기에 등장하는 갓 혼인한 남자에 대한 규정에서 "그를 군대에 보내서도 안 되고 그에게 어떤 의무를 지워서도 안 된다"(신명 24,5)고 명시되어 있을 정도니까요.

여러 날 동안 열리는 혼인 잔치는 가문과 마을의 커다란 행사입니다. 더우기 신랑의 친구라면 열 일을 제쳐두고 신랑 곁을 지키며 잔치를 더욱 풍성하고 흥겹게 해주어야 하지요. 신랑 곁에 있는 자체가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그때에 어떤 금욕적 의무를 고수하느라 잔치의 판을 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먹고 마시기만 할지언정 신랑과 누리는 기쁨이 우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기도와 단식"을 한 편에, "먹고 마시는 일"을 다른 편에 놓고, 양 편을 갈라 대립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경건함과 거룩함이 인간의 본성과 별개의 문제라 여기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성과 속의 철저한 별리 구조라 할까요.

그런데 우리의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일"을 "기도와 단식"과 더불어 주님을 섬기는 일로 통합하셨지요.


세상에 남을 우리를 위해 당신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고 마시도록 하심으로써 "먹고 마시는 일"도 영원한 생명을 맛보는 하느님의 일로 격상시키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실 새 계약은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중재로 하느님과 맺은 옛 계약을 부정하거나 전복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토대 위에서 직접 파스카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완성하신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리신 율법의 말씀을 간과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덧붙이고 재단해 형식 속에 가둬버린 정신을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빛을 발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루카 5,39).


예수님은 아무리 당신이 자신을 제물로 내놓는 최고의 사랑을 실천한다 해도 옛 포도주 맛에 길들여진 많은 이들이 옛 것을 고수하리라는 걸 모르시지 않습니다.


새로움에로의 변화를 거부하고 익숙해진 제도와 틀에 안주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 자체를 충성으로 여기기에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그것까지 포함해 모두를 포용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콜로새 신자들에게 써보낸 그리스도 찬가 부분입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통찰하여 우주적 차원에서 노래한 찬미가라할 수 있지요.

모든 만물은 "그분 안에서 ...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설령 민족, 언어, 문화, 종교, 역사가 다르다 해도,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창조된 모든 존재는 이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옛 것과 새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로 화해하여 통합됩니다. 진정한 평화입니다. 십자가의 가로 축은 온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포용을, 세로 축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사를 한 줄기로 잇는 창조의 정통성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된 모든 만물은 하나의 노래를 부릅니다.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 엄격히 분리시킨 "기도, 단식"과 "먹고 마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도 안에서 메뉴얼로 분화되고 경직되어 버린 하느님 섬김의 장치를 혼인 잔치의 기쁨 안에 새롭게 녹여내십니다.


새 신랑과 함께하며 새 포도주에 취한 이들은 창조된 본성대로 모두 함께 저마다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고의적으로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는 이상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는, 분리와 구별을 그치고 포용과 통합의 정신을 되살리라고 온 몸으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루카 5,34).


형식과 틀에 매여 사느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지금, 여기" 혼인 잔치의 행복을 놓치지 않도록 합시다. 예수님께는 고행과 금욕 못지 않게 먹고 마시는 일도 기꺼워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에 겨워 번지는 맑고 싱그러운 웃음소리도 눈물과 땀방울만큼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이 될 수 있답니다. 혼인 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기쁨을 실컷 누리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