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dariaofs 2019. 9. 14. 03:42



인류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매달리신 십자가를 기억하고 경배드리는 날입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는 구리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민수 21,4).


약속의 땅은 멀고 광야의 시간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집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 요소인 물도 떨어지고 양식이라고는 만나 뿐이니 온갖 불평에 욕구 불만까지 차오릅니다. 그들은 또 모세에게, 하느님께 불평합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시면서 불평을 해소해 주신 것과 달리 이번에는 불뱀을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하게 하시지요. 이 재앙에 놀라 모세에게 죄를 뉘우치며 간청하는 백성을 위해 주님께서는 새로운 해법을 내려 주십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 21,8).


하느님은 불 뱀을 없애 주시지 않고, 또 기적으로 물린 상처를 씻은 듯 낫게 해 주시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시지 않고, 물릴 경우에 목숨을 건질 방도를 마련해 주십니다.


흉측한 불 뱀 모양의 구리 형상으로요. 굳이 백성에게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된 뱀을 본떠 만들라고 하신 이유를 헤아려 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불 뱀을 해법으로 제시하셨던 하느님께서 인류의 죄악에 대해서도 일맥상통하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죄악을 싹 없애버리신다거나, 죄 지은 이를 본인도 모르게 자동으로 원상 회복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외아들에게 인류의 죄를 지워 높이 달리게 하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2코린 5,21).


예수님은 혐오스런 불 뱀의 형상 못지 않게, 인간의 죄를 몽땅 다 뒤집어쓴 가장 처참한 몰골로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곧 뱀에는 뱀의 형상, 죄에는 죄의 형상입니다.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아들을 통하여!" 인류 구원은 성삼위 하느님의 공동 과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께 인류 구원의 열쇠를 맡겨주십니다.


광야 어디에서건 뱀에게 물린 이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구리 뱀이 매달린 기둥을 찾아와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고 하듯이,


 하느님께서 직접 죄악을 그냥 뚝딱 없애시지 않고, 죄악에 덜미가 잡힌 이라도 마음을 돌려 간절한 믿음으로 십자가 예수님의 속량을 믿는다면 구원을 받게 하신 겁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살아났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의 구리 뱀이 십자가 예수님의 예표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리 뱀과는 달리 온전한 자기 희생이 수반된다는 점에 있어서 차이가 나지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치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이 엄청난 피의 값이니까요.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이리라"(영성체송).


주님의 갈망, 그분의 허기가 짐작이나 되십니까! 인류에 대한 그분의 구원 열망과 의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모든 사람!" 주님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고 꿈꾸시고 기대하십니다.


그러니 한 점 티끌도 못 되는 우리가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 안에서 신분 서열로 구분하고 차별하거나, 같은 믿음을 지니지 않는다고 함부로 비그리스도인들을 냉대하고 밀어내고 소외시켜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 주님의 이 통 큰 사랑의 청사진 덕분에 우리 역시 운좋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존재가 된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죄 때문에 아파하실 벗님, 오늘 십자가를 한번 쳐다 보십시오.


거기 벗님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달려계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이제 십자가로부터 치유를 받은 벗님, 주님의 "십자가로 모든 사람 이끌어 들이기" 프로젝트에 저와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성 삼위 하느님의 공동 과업에 벗님을 협력자로 부르십니다. 아멘으로 응답하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