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dariaofs 2019. 9. 16. 04:24



오늘 미사 독서들에서는 말씀을 대하는 참 중요하고 아름다운 길들이 드러납니다.

복음에는 병든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는 백인대장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병행구인 마태복음 (8,5-13)에서 백인 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한 것과 달리, 오늘 우리가 만나는 루카복음에서는 중개인 역할을 할 사람을 보내어 청을 드립니다.


누구의 기억이 더 정확한가의 문제라기보다, 아마 복음사가가 더 의미를 두려는 부분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루카 7,1).


백성에게 당신 말씀, 가르침을 다 전하신 뒤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백인대장이 보낸 유다인 원로들과 마주치십니다. 그들은 백인대장의 병든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간곡히 청하였"(루카 7,4)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동행해 백인대장의 집 가까이에 이르셨을 때 또 다른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백인대장의 친구들입니다. 유다인 원로들이 예수님께 자기들 의견을 피력한 것과 달리, 친구들은 백인대장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루카 7,6).
예수님께 누군가를 보낸 것이 짐짓 권위를 행사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 서기 부당한 자기 처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니, 당시 로마 치하의 이스라엘에서 로마인 백인대장이 한 식민지 백성 젊은이에게 한 말이라 믿겨지지 않을 만큼 겸손하고 온건합니다.

백인대장은 오로지 "말씀"을 원합니다. 그 "말씀"이 비록 현장에서 직접 대면해 발설되지 않아도 효력을 발휘하리라는 것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습니다.


군대 조직의 생리를 잘 아는 그로서는 명령, 곧 말의 힘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접 들은 말은 물론이거니와 위임된 말이라도 복종이 곧 생명이고, 불복종은 곧 죽음이니까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십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말씀을 소유한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된 하느님의 말씀을 번번이 거부하다가 급기야 육화하신 말씀을 몰라보고 결국 배척하여 살해할 미래를 품고 있는데 반해,


오히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이방인의 입을 통해 고백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감동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겠지요.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루카 7,10).


눈치 채셨겠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병든 이나 치유에 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인대장이 청한 건 오직 말씀이었는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백인대장의 믿음에 탄복하셨을 뿐인데, 그래도 노예는 나았습니다! 그는 자기에 대한 직접 언급 없이 그저 주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감탄"으로 치유를 얻은 것입니다.

병에게 또는 환자에게 어떤 말씀을 내리신 게 아닌데 치유가 일어난 오늘의 기적을 관상합니다.


 말씀만을 원하고 청했는데 말씀조차 없이 그가 나은 것은, 간청을 듣고 움직이신 예수님 마음의 연민, 의지, 방향성이 이미 치유를 지향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이 곧 성부께서 발설하신 말씀 자체이시므로 굳이 당신 입을 통해 언명체계를 빌어 표현하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지향만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감탄하고 칭찬하신 자체로 백인대장의 믿음은 보상을 받은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백성에게 직접 "말씀"을 들려주시는 예수님 모습에서 시작해, "그저 말씀만" 원하는 백인대장의 겸허한 간청으로 이어지다가, 소리가 동반된 "말씀"이 아닌, 말씀이신 분의 의지가 완성한 치유로 마무리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에 대해 권고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1티모 2,1)는 권고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고 기도하고 전구하고 감사하는 몫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 유달리 많이 등장한 중개자들, 즉 병든 노예를 대신해 간청한 백인대장이나 그의 대변인이 되어준 유다인 원로들, 심부름 왔던 친구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한 분 중개자이신 예수님! 그분이야말로 마음의 연민과 의지와 지향, 행동으로 하느님을 움직이신 진정한 중개자시지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모든 역사와 시대의 사람들에게 두루 당신을 드러내셨지요. 하느님의 말씀께서 겸손하시게도 인간이 사용하고 이해하는 각 언어의 체계 안에 담기심으로써 사람들과 접촉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그 말씀들이 가르치고 깨우치고 권고하며 다가옵니다. 어떤 때는 많은 말씀들이 아닌 단 한 마디로 영혼을 꿰뚫으며 들어오기도 하시지요.


그리고 어떤 때는 ... 아무 말씀 없는 침묵 가운데 당신의 연민과 의지와 방향성을 감지하도록 당신 존재를 몸통째 내어주기도 하십니다.


발설하신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써가 아니라 말씀 자체이신 당신을 터치하게 하심으로써 언명체계에 갇힌 말씀이신 분의 핵심, 정수, 본질에 와닿도록, 당신을 만지도록, 당신을 품에 안도록, 그래서 당신을 알도록 허락하시는 놀라운 겸손이시지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한 분 중개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를 뵐 수 있게 되었지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그분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갈 날을 고대합니다.


이처럼 "말씀" 역시 언어 체계의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말씀에 깊이 깊이 머물고 사랑하고 되새길수록 말씀이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보여 주십니다. 말씀에 담긴 하느님을 직접 감지하고 사랑하고 터치할수 있도록 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하느님께서 왜 보잘것없고 부족한 우리에게 이처럼 어마어마한 신비를 허락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바로 오늘 복음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루카 7,2).


우리 한 명 한 명이 주님께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렇다고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을 치유하고 일으키시는 말씀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소유하도록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모두 깊이 깊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 여러분 각자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과 하나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