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9.17.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dariaofs 2019. 9. 17. 06:31


오늘의 말씀에서는 교회가 보입니다. 죽음과 생명, 상실과 회복의 여정을 반복해 걷는 동안 그리스도의 몸으로 눈부시게 성장해가는 우리의 교회 말입니다.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었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루카 7,12).


나인이라는 고을 성문에서 예수님이 장례 행렬과 마주치십니다. 과부의 외아들 장례라고 합니다.


 여성의 지위가 종속적인 당시 사회에서 과부라는 신분도 기댈 곳 없는 약자에 속하는데, 그나마 하나 있던 아들까지 잃었으니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가련한 신세가 된 한 여성이 거기 있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루카 7,13).


누가 봐도 안타까운 상황이라 고을 사람들도 큰 무리를 지어 애도하고 있고, 예수님 역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십니다. 그분 마음에 솟구치는 연민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처지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향한 사랑이었을 겁니다.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루카 7,13).


예수님께서 행렬을 멈추십니다. 애도와 슬픔의 행렬을 중단시키시는 겁니다. 이제 생명의 주인이 나서실 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루카 7,15)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거대 악의 손아귀에서 그 젊은이를 빼내어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그에게는 생명을, 그녀에게는 미래를 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기적의 근원에는 죽음으로 대변되는 악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인류를 향한 연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자리합니다.

교회는 많은 표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지요.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어머니라는 표상을 지닙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을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는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생명을 교회를 통하여 받게 되므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에서 여전히 죽음의 세력은 교회를 박해하고 있지요.

슬프게도 우리는 매일 거리에서, 광장에서, 성문에서 이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인권이 죽고 정의가 살해되고 공정이 병사한 슬픈 장례 행렬입니다.


편리주의와 소비주의로 환경이 죽어가고, 자국이기주의와 인종차별주의로 범세계적 공동선과 협력관계가 파괴됩니다. 극단주의는 종교적 진리를 왜곡해 저격하고, 신 계급사회와 물신주의는 차별과 구분으로 인간 존엄성을 살상합니다.

이처럼 인류가 겪는 무수한 실존적 죽음 앞에서, 날마다 피흘리며 죽어간 소중한 외아들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어머니인 교회는,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품을 활짝 열어 눈물과 애곡과 절규를 받아들이며 나아가는 중입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으로 직접 관에 손을 대어 죽음의 행렬을 막아서시기 때문입니다. "울지 마라"(루카 7,13) 위로하시고, "일어나라"(루카 7,14) 끌어당기시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감독, 봉사자의 자질, 자격, 조건을 세세히 나열합니다.


일일이 체크해 보자면 나름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는 사람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그 기준이 상당히 높지요. 이 채로 거르면 교회 직분 안에 누가 남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바오로 사도가 부적격자를 가지치기하기 위해 내놓는 조건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지상의 나그네인 교회는 세상 안에서 존재하고 살아가기에 때도 묻고 주름도 지고 죄악에 오염되기도 합니다.


이기주의와 차별, 물신주의처럼 세상을 좀먹는 악이 교회 안에 버젓이 스며들어와 더 깊은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고요. 하지만 교회는 거기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문턱에서 예수님이 죽음의 세력을 막아서고 중지시키며, 위로하고 되살리고 촉구해 날마다 그 생명을 되돌려 주시기에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힘껏 새 생명을 보호하고 양육합니다.

죽음과 생명, 상실과 회복을 연거푸 겪고 있는 교회는 아들을 잃고 또 다시 그를 얻습니다. 잃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날마다 더 푸르게 더 싱싱하게 되살아납니다.


죽고 사는 반복을 거치는 동안 부족함 가득한 몰골로는 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질로 변모됩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1티모 3,9) 교회는 본성상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되찾은 새 생명은 예수님의 연민이 낳은 결실입니다. 미약하고 부족한 존재지만 세상의 거대한 죽음의 행렬을 막아서고 죽음의 손아귀에서 생명을 빼내어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는 힘도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연민,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 연민은 교회 담장을 넘어 세상을 정화하고 되살리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가 일상 안에서 사소한 차별, 사소한 구분, 사소한 편가르기, 사소한 배금사상을 이 연민의 힘을 빌어 내려놓으면,


그 사소함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이웃들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불의하고 슬픈 장례 행렬을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을 지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이 실패한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시작한 수도회가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자기가 창설초기에 생각했던 그런 모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카리스마는 사라져가고 제도로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였지요.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 따지기 위해 라베르나 산에 올라 대피정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화두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할 정도로 그 크신 사랑을 내가 느끼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겪으신 그 고통을 나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게 네 수도회냐, 내 수도회냐?"라는 하느님의 응답에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회의를 말끔히 떨쳐 버릴 수 있었고, 오상을 받음으로써 예수님의 그 고통을 실제로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지금 어떤 영육간의 고민을 가지고 있나요? 그리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께 어떤 청을 드리고 있나요?


오늘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로 그 고민에서 말끔히 벗어나 나인의 과부처럼 새 생명과 희망으로 충만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