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9.15. 연중 제24주일 - 오상선 바오로 신부

dariaofs 2019. 9. 15. 05:29



오늘 미사 말씀들에는 용서하시는 하느님 모습이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심경 변화를 보여줍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사십 일을 지내는 동안 광야에서 백성은 금 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 흥청거리며 놀았다"(탈출 32,6)고 하지요.


이에 분노하신 하느님은 그들을 "너의 백성"(탈출 32,7)이라 부르며 없애 버리려 하십니다.

"너의 백성"... 이 아픈 표현에는 그들에 대한 실망과, 관계를 끊으리만치 소스라치게 고통스런 상처가 자리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세의 간청에 산산이 부서진 가슴을 추스르며 이내 마음을 돌리시지요.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탈출 32,14).


성경 저자는 의도적으로 "당신 백성"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다시 관계가 복원되었음을 알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저버린 관계가 하느님의 용서로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처지를 꾸밈없이 담백하게 드러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1티모 1,15).
그는 예수님을 박해하던 자신의 오류와, '죄에 묶인 비참한 실존'(로마 7,15-24 참조)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토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6).


죄가 없으면 자비 또한 불필요하겠지요. 건강한 이에게 의사가 필요 없듯 말입니다. 그런데 "한없는 인내"(1티모 1,16)의 모습으로 바오로 사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내리신 하느님 자비는 분명한 목적성을 지닙니다.


바오로 사도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해 주시는 데 그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1티모 1,16)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우리가 얻은 이 용서와 자비의 은총은 특정한 소수에게 일시적으로 베풀고 그치는 특혜가 아니라, 죄인의 실존을 자각할 미래의 하느님 백성을 위한 본보기, 즉 샘플이고 견본입니다.

복음은 세 일화를 통해 하느님 마음을 펼쳐 보여줍니다. 세 개의 비유에는 공통적으로 "잃었다가 찾은"(루카 15,6.9.24.32) 사건과, 찾은 뒤에 벌이는 "기쁨의 잔치"(루카 15,6.9.23.32)가 등장합니다.


잃었을 때 염려와 상실감, 슬픔, 도로 찾으려는 집념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되찾았을 때는 한바탕 축제로 변할 만큼 극적인 반전을 보여줍니다.

"먹고 즐기자"(루카 15,23).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고 아버지가 외칩니다. (방종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의 기질이 어느 정도 아버지의 흥을 닮은 게 아닌가 잠시 곁길로 새게 되네요.)


잔치는 둘째 아들의 지위를 탈선 이전으로 복원하는 전례적 사건인 동시에 새로남, 새로 받아들임을 공표하는 공식적인 장이 됩니다.


기쁨과 흥겨움, 포식과 흥취는 누구건 그를 인정하고 마음껏 축하하는 이의 권리요 의무(루카 15,32 참조)가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루카 15,29).


동생의 환대를 거부하는 큰 아들의 볼멘 절규가 아버지의 마음을 후벼팝니다. 그 내용이 참 마음 아프게 들리네요. 그는 아버지를 군주나 주인처럼 설정해 놓고 자신을 노예, 종의 위치에 놓은 채 불쌍히 맹종해 왔습니다.


사랑과 신뢰로 다정해야 할 부자 관계를 자기도 모르게 주종 관계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아버지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모습과 비슷하게, 죄 없고 실수 없고 헛점 없고 요구도 없는 완벽한 성실맨으로 틀을 짜고 재단한 또 다른 우상화의 전형입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루카 15,18).


오히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에 신뢰와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헤픈 사랑에 대한 기억일까요. 어쩌면 그는 이미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그는 100퍼센트 맞을 자신은 없더라도 그 아버지가 자기를 품팔이꾼으로라도 다시 거둬주시리라 예상하고 기대합니다. 비록 죄는 지었을망정 그는 아버지의 본성을 제대로 꿰뚫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요? 물론 형으로서 동생에 대한 단죄와 징벌의 심정이 질투와 뒤섞였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 제게는 '혹시 큰 아들은 실망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그가 아버지를 자기 식대로 우상화해 왔기에, 자기가 만들어놓은 우상과는 너무도 다른 아버지 모습, 즉 죄인인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헤프고 절도 없는 태도가 실망스러웠던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또 아버지라는 우상 안에 주입한 자기 모습과 진짜 아버지의 모습이 슬프게도 너무 닮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면서 이질감과 괴리감, 소외감까지 든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큰 아들이 잔치 바깥 어둠 속에 머무를지, 실망과 혼돈을 거쳐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앎을 수용하고 낯을 바꾸어 환대의 잔치판에 더덩실 춤추며 뛰어들지 비유의 결말은 열려 있습니다.


분명한 건 그가 자기의 의로움, 자기가 우상화한 아버지의 의로움이 진실과 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옳으셔야 한다.(내 생각과 같으셔야 한다.)
하느님은 항상 정의로우셔야 한다.(내 의견과 같으셔야 한다.)


혹시 이처럼 아버지를 내 틀 안에 가두고 있다면 나는 또 다른 우상숭배자일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께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하며 손가락질하고 궁시렁대며 큰아들의 혼돈 속에서 긴긴 나날을 보낼지도 모를 일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나와 타인을 향해 조건 없이 "달려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시는"(루카 15,20) 아버지의 헤픈 사랑을 믿고, 먹고 즐기는 한바탕 사랑의 축제 안으로 뛰어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첫째가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을 무조건 믿어보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죄의 어둠 속에서 구원을 더듬어 찾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우리를 "본보기"로 삼으시도록 허용해 드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은총은 우리만을 위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