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대축일을 지난 20일(금)에서 이동하여 오늘 경축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영의 원리와 육의 원리를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면서 우리를 주님의 길로 초대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수님은 이 말씀을 특정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십니다. 제자단에 속해 있건 아직 아니건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이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의무라는 뜻일 겁니다.
"자신을 버리고"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인간 실존은 매순간, 부지불식 간에 영과 육의 갈등과 대립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영의 방향성과 육의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육신의 욕구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일상의 작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삶의 분기점이 될 중요한 순간까지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를 감지하고 따를 수 있으려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에 더하여 자신의 충실한 훈련이 뒷받침 되어야 하지요.
내가 선택한 것이 주님의 뜻인지 나 자신의 욕구였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부단히 기도하고 성찰하면서 성령께서 터치하시는 감을 익혀나가야 합니다. 그분께 경청하고 순종하는 감각은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도 쌓여가지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전자의 "목숨"은 육신의 생명이고 후자의 "목숨"은 영원한 생명을 가리킬 겁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자들이 믿음으로 쟁취한 바지요. 그런데 이 승리를 알아보는 눈에도 영의 시각과 육의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지혜서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 고난으로 생각되며 ...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 3,1-2)
하느님 손안에 감싸인 존재의 행복은 세상 사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벌어지는 현상만 육의 눈으로 보고 물질과 힘의 견지에서 판단할 뿐이지요. 그러니 그들에겐 영적 삶이 어리석고 불행할 따름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평화와 영의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는 접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어떠한 육의 힘도 하느님과 우리의 영의 결합을 약화시킬 수 없다고 외칩니다.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이 말씀은 이론에서만이 아니라 바오로 자신의 처절하고 절박한 실존적 체험에서 길어올린 진실입니다.
육의 공격이 육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지만 영의 생명에는 손끝 하나 댈 수 없다는 걸, 동족과 이방인의 배척과 공격으로 생의 끝자락을 오가며 깨달은 뜨거운 고백이지요.
우리 신앙의 역사는 조상들 스스로 진리를 찾고 받아들인 자발성으로 볼 때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기적입니다.
또한 짧은 신앙생활과 빈한한 영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피를 흘려 그리스도를 증거한 무수한 순교의 자취는 거의 신비에 가까울 겁니다.
더구나 많은 순교자들이 철학적 신학적 문화적으로 취약한 신분의 단순한 민중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땅에 임하신 성령의 힘이 그만큼 강하고 놀라운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오히려 사회 속의 안전지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우리는 새롭게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박해와 순교가 그친 초세기에 교회가 안일함과 풍요에 젖어 진리의 빛이 퇴색되고 말씀의 칼날이 무뎌갈 때, 보다 철저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려 광야로 떠난 이들이 있었지요.
광야는 또다른 순교의 장소이고, 그 안에서 바치는 침묵과 고독은 또다른 순교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두가 광야로 나갈 수도, 모두가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매달려 살 수도 없지요.
우리가 각자 삶의 작고 소소한 순간에서부터 성령께 귀기울이고 순종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곧 자아와 욕구 안에 깃든 육의 원리에 죽음을 고하는 일종의 순교가 될 것입니다.
쉽고 편하고 드러나고 움켜쥐고 높아지고 힘을 행사하는 육의 손짓은 당장 달콤할지 모르나 선택을 반복하는 사이 영의 자리, "하느님의 손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답니다.
오늘의 말씀 중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구절이 다가오셔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 3,9)
여러분 모두 이토록 아름답고 복된 영의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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