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시는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한 친척들이 그분을 붙잡으러 나서는 '예수님과 베엘제불' 일화에 이어서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오늘의 대목을 배열했지만(마르 3,20-35 참조),
루카 복음사가는 이 대목과 베엘제불 이야기를 별개의 사건으로 뚝 떼어 이야기합니다(루카 11,14-23 참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머니 마리아나 형제들에 대한 거부로 이해하면 곤란할 겁니다. 예수님은 그저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기존의 개념을 확장하고 계실 뿐입니다.
흔히 쓰는 가족 구성원 명칭은 철저히 혈연 중심으로 사용해 왔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것이니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안에는 혈연적 관계는 물론 포함될 것이고, 이를 넘어서 하느님의 백성 모두에게 가족의 자격이 부여되는 겁니다. 비록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로 연결되는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집 공사가 계속되게 하여라. ... 그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짓게 하여라"(에즈 6,7).
제1독서에서는 키루스 임금의 칙령으로 시작된 해방과 귀향이 그저 장소적 이동만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환희의 날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명령과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와 다리우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명령에 따라 건축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에즈 6,14).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방신을 섬기는 타 민족 통치자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명령이 완수됩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대로 그분의 뜻에 순종한 페르시아의 이 세 임금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한 이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들도 예수님의 가족들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이면서 하느님 말씀을 기점으로 혈연을 초월해 우리와 형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율법도 희생 제사도 성전도 모르는 그들이 말씀 실행을 매개로 하느님의 일꾼,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벗이 된 겁니다.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완공한 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사제들은 저마다 번별로 세우고 레위인들은 저마다 조별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을 섬기도록 하였다"(에즈 6,18)고 합니다.
율법 준수와 성전 경신례를 회복하는 장엄한 순간, 그들은 얼마나 감동스럽고 감사하고 행복했을까요!
조상들의 영화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성전에서 어느 누구의 속국이 아닌,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한 자유민으로서 올리는 오십 년 만의 제사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치의 기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앞서 다리우스 임금이 한 말 중, "제자리"라는 말씀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혈연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확장하신 것처럼 "제자리" 역시 공간 개념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안의 예루살렘 특정 지역이 과거 성전의 "제자리"라면, 예수님 이후 "제자리"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기억나실 겁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
혈연 개념 파괴(?)에 공간 개념 파괴(?)까지 우리 예수님 참 획기적이고 참신한 분이시지요!
우리는 공간적 "제자리"를 찾았다고 감동하던 구약 백성의 체험을 넘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머무르는 곳에서 제자리를 찾은 존재들입니다.
율법과 제도적 신분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를"(요한 4,23) 드리는 모든 곳이 우리의 "제자리"니까요.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면, 그리고 어린아이가 발돋움하듯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그 말씀을 실행하려 애쓴다면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고 형제들입니다.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우리의 자리가 곧 "제자리"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머무르는 그곳에서 말씀과 주님 현존으로 충만한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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