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1독서 이야기를 먼저 할까 합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에즈 1,1)
기원전 587년 유다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하게 된 후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키루스라는 임금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 임금이지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그럴만한 힘을 소유한 어떤 이방인의 마음을 움직이신 겁니다.
이사야 예언서에 등장하는 "주님의 종"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일 수도 있으며, 그밖의 어느 특정 인물일 수도 있는데, 키루스 임금도 그 가능성 중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물론 유다인 입장에서는 그가 이스라엘을 유배에서 해방시킨 영웅적 존재이기는 하나 이방인인 탓에 이 가설을 썩 환영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이사 42,6)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의 한 대목입니다. 하느님께서 귀양살이 억압에 시달리는 당신 백성을 위해 키루스를 "만국의 빛"(공동번역 성서 이사 42,6)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은 당신 계획을 위해 사람의 마음 또한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키루스는 이에 순종하지요.
에즈라기 1,2-3을 보면, 키루스 임금은 여느 유다인 못지 않게 진지하고 균형 잡힌 신관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권력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고백하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현존을 기원하고 축복하는 성숙한 인격을 지닌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는 "빛"이 등장합니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
어둠을 비추는 등불의 속성상 그 빛을 효과적으로 퍼뜨릴 수 있는 위치에 놓는 것이 보통입니다. 기껏 불을 켠 뒤에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는 않"지요.
기름과 심지를 담은 등잔은 불빛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 불빛이 드러나야 사람들이 그 빛 속에서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 등잔은 홀로 뽐낼 것도 우쭐할 것도 없이 불빛을 품을 때 비로소 가치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등잔은 제 스스로 등경 위를 찾아 올라갈 수 없습니다. 주인이 등잔에 불을 붙여 알맞은 위치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처럼 말입니다.
키루스라는 등잔이 "마음을 움직이신 "하느님 뜻에 순종하여 불이 붙여지자 곧 "등불"이 되고 "빛"이 됩니다. 이 놀라운 업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을 선물하시려는 하느님의 손길 덕분이지요.
예수님의 "등불과 빛"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 빛 앞에 서면 숨겨진 것도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됩니다.
하물며 물리적인 빛도 그럴진대 영의 빛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그리스도의 빛 앞에 노출된 이는 자기의 약함과 죄악을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비참함에 두려움이 몰려와 도망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만, 그 빛을 계속 쪼이면서 정화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자신을 내어맡기다 보면 점점 더 그 빛을 갈망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루카 8,18)
이제 문제는 등불의 자리가 아니라 빛을 받는 이의 자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쏟아져 내리는 빛을 제자들은(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루카 8,18)
빛을 갈망하는 이는 비록 눈부신 빛 때문에 눈이 멀어버릴 지경에 이른다 해도 빛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그 빛을 더,더,더 충만히 받아 누릴 것입니다. 영적 가치와 체험을 사랑해 오매불망 하느님을 향하는 이도 마찬가지겠지요.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참으로 슬픈 말씀입니다. 현대사회의 경제논리가 극단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치달아가는 형국에 영의 세계도 그렇다니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입니다.
아무리 햇빛이 찬란히 내리쬐어도 온 몸을 꽁꽁 싸매고 그늘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으면 빛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으니까요. 영의 빛, 그리스도의 빛에 관심이 없는 이도 그와 같습니다.
빛을 향하지 않을 뿐더러 빛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이는, 아무리 세상에서 높고 화려하고 힘 있고 부유해도 영혼은 폐가처럼 무너져내릴 뿐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복음 환호송)
하느님 덕분에 부족한 우리에게서도 새어나오는 모든 빛은 등잔에 불과한 우리 자신이나 빛 자체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비춰지는 것입니다. 크건 작건, 강렬하건 희미하건 그 빛을 보는 이가 빛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으면 족합니다.
자기의 결단이 제 마음을 움직이신 하느님의 손길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어도 이방인 임금 키루스는 그분의 빛이 되어 소명을 완수하고 우리에게까지 의로움과 공정의 사람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그의 존재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 우리 마음을 건드리시는 성령께 영혼의 촉각을 활짝 열고, 아직 모르는 그분 계획을 순히 듣고 순히 내어맡기는 도구가 되라는 초대장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리"시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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