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모두의 축일입니다. 교회가 성인으로 기리는 분들은 물론, 이름이 남겨지지 않았지만 주님 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무수한 무명의 성인들도 기억하며 경축하는 날이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니?" 하고 물으십니다.
"행복하여라"(마태 5,3-10).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이 말씀은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알리는 고전적 표현 방식이기도 하지만, 명령형으로도 들리고 감탄형으로도 들립니다.
세상 논리로는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은 이들을 거론하시면서 "행복하라!"고 명하시고 "넌 참 행복하구나!" 감탄하시니,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행복해야 하는 걸까요?
가난하고 슬프고 박해받는데 어떻게 행복할까요? 큰 소리 한 번 못 내고 맨날 지고 사는데, 무너지는 정의 앞에서 속이 타는데, 맨날 퍼주느라 바보 소리 듣고 이용만 당하는데, 두 마음 먹을 줄 몰라 맨날 요모양요꼴로 사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러고 살아! 재산도 좀 있고, 슬플 일은 피하고, 큰 소리로 내 권리 찾으면서, 원래 그런 거라며 불의도 슬쩍 넘길 줄도 알고,
자비도 손해 안 볼 만큼만, 이익이 된다면 양다리도 서슴없이, 당장 이익이 안 되면 평화는 무슨..." 하고 있다면 오늘의 말씀은 남의 나라 이야기, 사차원 언어에 불과할 겁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차지도 뜨겁지도 않게 예수님의 행복 선언과는 별개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지요.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가난 이야기를 하실 때 바리사이들이 비웃습니다(루카 16,14 참조).
아마 지금도 이 복음, 이 기쁜 소식이 울려 퍼질 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지 않겠지요.
못마땅해 할 수도 있고, 복음 속 부자 청년처럼 결국 슬퍼하며 떠날 수도 있겠지요(마태 19,22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기본이 되는 이 행복 선언은 실은 엄청난 도전입니다.
가장 가난해지기로 작정하고 오신 예수님과 함께 인식의 전환, 가치의 전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저 액자 속 이야기로 그치고 말 겁니다.
한편, 현재 가난한 마음으로 슬픔과 의분을 다독이고 있다면, 큰 욕심 없이 착하고 순수하게 살고 있다면,
하느님 손에 전적으로 의탁하며 박해를 견디고 있다면, 내 성공이나 이익보다 온 세상이 두루 평안하고 무탈하길 기원한다면 이 말씀들은 엄청난 축복이고 위로입니다.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이 말하듯, 그들은 지금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묵시 7,14) 하는 중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렇게 사는 이들의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영원한 생명을 지복직관이라 하지요. 이 지상의 순례 여정 동안 평생 그리던 님, 주님의 얼굴을 뵙고 그분 곁에서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이 행복에 대한 희망은 비록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주어진 삶을 소중히 안고 견디며 가는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게 된 삶을 감사하며 소박하게 성심껏 살면서도 이 말씀을 남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이 행복한 줄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나친 겸손 또는 완벽주의의 덫에 걸린 탓이지요. 내 가난과 의탁과 온유와 의로움과 자비와 깨끗함이 100%가 아니라서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물러서거나 스스로를 평가절하 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그야말로 "행복하라!"고, "넌 참 행복하구나!" 순수하게 감탄하며 던지시는 겁니다.
성찰한답시고 자신을 난도질하고 부족한 부분을 파내느라 우울하고 의기소침하라고, 저의를 깔고 의뭉히 제시하시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성인의 날은 무엇 하나 손색 없이 완벽한 성인을 기리는 날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을 뿐더러, 완벽한 사람을 성인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말씀하신 여덟 가지 항목을 다 갖추어야 행복한 게 아니라, 하나라도 얻어 걸리라고 여덟 개나 말씀하셨으니 그 하나라도 겨우 커트라인 걸리듯 걸치기라도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마태 5,12)해야 합니다.
오늘의 대축일은 주님 품 안에서 행복할 자질 하나만 있어도 가슴 쭉 펴고 실컷 행복하라고 펼쳐 주신 대축제의 장입니다.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죽는 날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지금 여기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덕은 덕을 부릅니다. 지금 완성되어 가는 덕이 하나라면 그 하나는 다른 덕을 부르고 또 다른 덕을 키우면서 차츰 조화롭게 변화되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모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지요. 우리는 모두 이미 성인이거나, 성인이 될 자질과 역량을 갖춘 존재들입니다. 우리 영혼과 인격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창세 1,27 참조)은 지워질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야, 행복하니?" 하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 마음을 열고 잠시 침묵해 봅시다. 내 마음이 무어라 답하는지 듣고, 또 주님께서 무어라 하시는지 귀 기울여 봅시다.
행복은, 진심을 다해 말씀드리는데, 결코 세상 가치들 순이 아닙니다.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스펙, 인맥, 명품은 잠시 허영심을 만족시켜주고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깊은 내면의 행복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내 인생의 두 주연, "나"와 "주님"의 행복 이야기에 고요히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뭔가 피어날 것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벗님의 본명(세례명) 앞에 거룩할 聖자를 붙여서 불러보십시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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