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들은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루카 13,23)
이 질문에는 묻는 이의 비관적 선입견이 묻어나는 듯합니다. 보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요?"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철부지 어린이의 마음으로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기존의 관념에 매인 이들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이 "좁은 문"이 꼭 물리적으로 폭이 좁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폭이 좁은 문이라면 들어가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리고 기다리기 힘들어서 그렇지, 입장이 제한되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좁은 문"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나는 문이다"(요한 10,9).
예수님은 당신을 문이라 계시하십니다. 과연 예수님은 문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샘이 흐르는 기름진 풀밭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영육으로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요로워집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요한 14,6 참조).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스스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선민 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위한 다른 문이 필요 없습니다.
율법과 경신례의 철저한 준수가 구원의 담보니까요. 그런데 느닷없이 등장하신 예수님께서 회개와 의로움과 사랑을 설파하시니 헷갈립니다.
그분 가르침에 따르면, 제법 열심하고 정결한 자기들보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니(마태 21,31 참조) 그동안 안주해 온 구원관이 뒤집힐 것같은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좁은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입니다만,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설렁설렁, 대충, 하는둥 마는둥, 들어가도 그만 안 들어가도 그만'이 아니라 "힘써야" 합니다.
또 마냥 열려 있지만은 않는 문이기도 하지요.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는"(루카 13,25) 때가 반드시 온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뒤늦게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주님과의 인연을 들먹이지만 주인은 냉정합니다. 모든 걸 아시는 분이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주님과의 인연은 피상적인 껍데기와 같은, 날려 버릴 검불 같은 끈이었던 겁니다.
그분과 먹고 마시며 그분 가르침을 들었어도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맺어지지 못한 관계는 모르는 사이만 못합니다.
새로운 초대와 기회를 가벼이 흘려보냈고 기존의 것에 매여 무심결에 거부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주님은 내내 거절 당했고 내침 당했으며 차선에 또 차선으로 미루어지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의"는 도덕적, 윤리적 범죄를 의미하지 않을 겁니다. 믿지 않은 불의함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서가 준비하고 가리키는 분을 마주하고서도 모르는 체, 보다 율법지향적이고 자기네 기득권에 도움이 될 다른 메시아를 기다린 불의한 침묵입니다.
"너희만 밖으로 쫒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루카 13,28).
그 결과는 "밖"입니다. 문을 통과해 들어가지 못했으니 구원의 바깥입니다. 구원, 하느님의 나라 안에는 선조들과 예언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든 믿는 이들, 이스라엘이 천대하고 소외시켰던 이방인들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된 이들을 "아드님과 같은 모상"(로마 8,29)이라 부릅니다. 피조물로서 얻는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30).
오늘 독서에 자주 등장하는 "미리"라는 말씀 때문에 구원예정설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신 모든 이가 다 당연히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매순간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지요. 정하셨지만 부르심에 응답을 하지 않기도 하고, 응하기는 했으나 의로워질만한 믿음을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먼저 택하시고 당신 것이라 불러주신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요.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이 적은지' 물었던 그 사람의 내면의 동요가 느껴집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정하시고 부르신 그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힘써야" 합니다.
기존 질서에 생긴 균열의 틈을 찢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의로움을 쟁취해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치 탄생의 순간에 좁디 좁은 어미의 산도를 고통스럽고 의혹 가득한 두려움으로 범벅이 되어 통과했듯이 말입니다.
구원. 참 아름답고 행복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 역시 그렇지요. 죄스럽고 모자라고 볼품없는 몰골로, 주제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보겠다고 힘쓰고 애쓰며 구원의 좁은 문이신 주님을 관통한 우리가 거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로마 8,29)으니 그 은총을 잃지 않도록 정말로 정말로 힘씁시다.
우리의 소중한 자유의지까지 다 동원해 온 힘을 다해 힘씁시다. 그 구원의 축복을 누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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