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11.0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dariaofs 2019. 11. 5. 04:42



루카복음 14장의 전반부는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초대받아 그의 집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초대와 초대받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지금의 분위기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을 떠올리는 걸 보니, 아마도 그는 지금 예수님과 한 상에서 음식을 나누며 퍽 흡족한가 봅니다.


 그의 말은 사실 진리의 선포인 동시에 예언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차원을 달리합니다.

비유 속 주인은 잔치 시간이 다 되었지만 초대받은 이들의 거부로 당혹스런 입장에 처합니다. 손님은 잔치를 베푼 주인의 위신과 평판을 좌우하기 마련인데 정성껏 준비한 잔칫집이 텅 빈다는 건 큰 낭패가 아닐수 없습니다.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루카 14,18).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루카 14,19).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루카 14,20).


초대에 응하지 않는 이들의 답변은 각양각색입니다. 이를 단편적으로 보면, 밭은 재산, 겨릿소는 일, 장가는 사랑과 가족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보다 당장의 재물, 일, 자기 가족과 욕구를 챙기는 모습을 가리켜 우리의 성찰을 촉구하지요.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를 이스라엘 상황으로 해석하면, 밭은 재산도 되지만 크게는 땅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사실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잃고, 되찾고, 빼앗기는 지난한 투쟁의 여정이지요. (오늘날까지도 말입니다.) 여기서 밭을 샀다는 건 이미 안전지대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꿈에 그리던 가나안에 정착해 한숨 돌린 뒤, 이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야훼 하느님을 잊고 그곳 신 바알에게 눈을 돌리지요. 안전지대에 들어선 이는 '등 따숩고 배 부른' 가운데 첫 마음이 퇴색되기 쉽습니다.


주인에게 초대받았던 기쁨과 설렘을 잊어버린 오늘 비유 속 첫째 사람처럼 말이지요.

겨릿소 다섯 쌍이면 크고 힘 센 소 열 마리입니다. 완전한 숫자지요. 농사와 건축 등 삶의 기반을 닦을 훌륭한 도구가 빵빵하게 뒷받침된 상태입니다.


무엇이 두렵고 걱정이겠습니까! 이제 제 힘과 능력과 기득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예전에 받아둔 초대장 따위는 뒷전이 되어 버립니다.

셋째 사람은 장가를 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혼인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가리키지요. 먼저 자기를 초대한 주인이 아닌 다른 이와의 혼인은 우상숭배를 뜻합니다.


게다가 그는 하느님의 신부에서, 다른 신부를 맞이한 신랑으로 자리를 옮겨갑니다. 다른 주인, 바알과 혼인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바알이 되는, 내 삶의 주도권은 온전히 내가 쥐겠다는 새로운 우상숭배입니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루카 14,21).


다급해진 주인이 종에게 이릅니다. 처음 초대 때는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이들입니다.


제대로 격식을 갖춰 차린 잔칫집에는 초대된 적이 별로 없었을 소외 계층이 어제에 이어 다시 거론된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관심이 그들에게 꽂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채워도 아직 자리가 남았다고 하네요. 이는 하느님 나라의 무한함, 광대함을 뜻합니다.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일러 누구라도 데려오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 14,23).


잔칫집이 손님으로 가득 차야 하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가득 차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본질상 충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는 두 갈래입니다. 그 중 하나는 처음 초대를 받았던 이들이 아무도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뼈아픈 선고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적이 충격이 될 수도 있는 진실인데, 곧 하느님 식탁 주변으로 불리운 우리 모두가 그 "아무나"라는 사실입니다! 여러 표현을 동원했지만 결국 그들은, 우리는 "아무나"입니다.

고을의 한길과 골목을 서성이던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 큰길과 울타리를 오가던 그냥 그저 그런 이들이 곧 우리입니다.


이제 주인은 잔칫집을 채우기 위해 외적으로 확연히 보이는 궁핍과 장애는 물론, 그가 어떤 인격인지, 숨은 죄나 악도 개의치 않습니다.


일단 불러서 당신이 마련한 음식을 먹입니다. 함께 잔치의 흥을 나누며 보잘것없고 비천한 우리와 하나가 됩니다.

잔칫집에 처음 초대된 이들과 나중에 불려온 이들의 차이는 명백합니다. 처음 초대된 이들은 응답을 거부했고, 나중의 이들은 각자의 사연과 처지가 어떠했건 그 긴박하고 엉성한 초대에 응했습니다.


처음의 이들은 제 힘으로 충만했고 나중 이들은 허술한 자기 실존을 안고 충만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원만하고 조화로운 공동체 삶을 위해 조언합니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로마 12,16).


"아무나"인 우리에게 남은 과제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비천하고 볼품없는 "아무나"라는 사실을 아직 인식하지 못 할 수도 있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너희는 그 "아무나"인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보면 우리 중 대개는 내외적으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몰골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에서 평화를 누리려면 비천한 나와 비천한 너를 포용하고 아우르는 겸손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칫상으로의 초대는 일생 단 한 번의 기회로 끝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번번이 거절 당하고 뒤로 미루어지시면서도 반복해 새로운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과, 그 잔칫상에서 생명의 음식을 나누려는 열렬한 갈망을 끄지 말고 주님의 초대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초대장이 울리는 알림음을 감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1-12).

"아무나"에 불과하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잔치의 구성원이 되어 주인과 기쁨을 나누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