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에서는 "기쁨"이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 차원의 기쁨이 아닙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인이라 무시하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지금 예수님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로 말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길 원합니다.
사랑과 경외심으로 가득 차서 말씀이신 주님을 만나 들으려 하는 몸짓에는 그분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 행위, 지향, 방향성 자체가 그들을 정화한다는 사실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놓치고 있지요.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들이는 예수님의 모습을 투덜대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중 두 개의 비유가 등장하지요.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루카 15,4).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루카 15,8).
무언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 사람이면 이들의 심정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그 잃은 존재가,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나머지 한 비유, 즉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고통과 절박함은 말이 필요 없겠지요.
무언가(누군가)를 잃어버리면, 사실 잃어버린 사람이 가장 놀라고 당황하고 낭패스럽습니다.
간수를 제대로 못한 스스로가 죄인처럼 느껴져 자책도 터져 나오지요. 비유 안에서 그 목자는 스스로를 '양을 잃어버린 죄인'이라, 그 부인은 '은전을 잃은 죄인'이라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심정 또한 그러했을 것이고요.
당신 사랑의 품을 떠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심정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요?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처럼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이 '율법준수, 바른생활'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에게는 떠난 이가 괘씸하고 배은망덕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어 본 사람, 떠나보낸 사람은 압니다.
백 번 천 번 후회하고 되짚어 보며 자책을 일삼다가,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되돌리고 싶은 마음 뿐이지요. 떨어져 나간 이에 대한 상실감과 고통이 마음 안에서 들끓어서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비유에는 양 한 마리와 은전 한 닢이었지만 그것이 사람이라면, 셋째 비유처럼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어떨까요. 세 비유의 일관적 주제를 보건데 목자나 부인이 단순히 자기들 재산을 만회하기 위해, 완벽한 수량을 채우기 위해 수고를 감수한 것은 아닐 겁니다.
자신의 품을 떠나간 존재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미지의 위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얼마나 애가 타고 간이 졸아들고 심장이 타들어 가겠습니까? 잃어버린 이의 근심과 염려, 조바심은 그를 가만히 있게 놔두지 않습니다.
떠난 존재를 찾을 때까지 뒤쫒게 만들고, 집안을 샅샅이 뒤지게 만들고, 동구 밖을 응시하며 기다리게 만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 죽음과 부활의 목적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그러니 비유 속 목자의 원형이신 예수님은 산 이들뿐만 아니라 죽은 이들까지도 되찾으려 죽음에까지 달려 들어가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마지막 한 사람까지 되찾으시고자 생명이신 분이 죽음 안에까지 뒤쫓아 들어가신 것이지요. 자의로 떠나갔건 길을 잃었건 그 존재가 그분께 참으로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9).
그렇게 얻은, 되찾은 존재는 주인의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전염이 됩니다. 주인이 부른 "친구들과 이웃들"은 마땅히 주인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친구와 이웃이라면 주인이 겪었을 상실감과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나누어 받았을 것이니까요. 또 함께 기뻐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주인의 기대이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로마 14,10)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는 모습과, 또 그들이 예수님께 받아들여지는 흐뭇한 모습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측근임을 자부하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은 함께 기뻐해야 옳았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호통은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뿐만 아니라 마치 그들의 후예인양, 자기도 길 잃은 양 처지이면서 제 모습을 못 본 채, 세상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 화살을 들썩이는 우리 모두를 향한 일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반복되는 "기쁨"은 혹독한 상실의 고통을 거쳐 회복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저 감정적으로 스쳐가는 찰나의 즐거움과는 다르게 다가옵니다.
목자의 기쁨, 한 부인의 기쁨, 하늘의 기쁨, 하느님의 천사들의 기쁨, 그 기쁨에 초대된 친구들과 이웃들의 기쁨...
그리고 겉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세리와 죄인들의 기쁨까지 관상한다면, 우리는 말씀을 통해 바로 예수님의 기쁨, 하느님의 기쁨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쁨 속에 있나요? 아버지의 되찾은 기쁨, 되찾아진 죄인의 기쁨 속에서 행복한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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