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우리를 봄, 관상으로 초대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요한은 사람들을 "봄"으로 초대합니다. 물론 단순히 주위를 환기하거나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의도에서 "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요한의 경우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한 증언이기에 그렇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1,31.33).
사실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온전히 확신하지 못했었습니다. 제자들을 그분께 보내 "오실 분이 당신이신지"(마태 11,3 참조) 물은 적도 있었지요. 지금도 그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노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 고백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했지만 보았습니다. 이 "봄"이 그를 앎으로, 확신으로 이끌었고, 그래서 그는 증언합니다.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그가 원래 잘 몰랐기에 이 증언에 신빙성과 무게가 더해집니다. 모르던 걸 보고 알게 되어 확신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이 증언이 이토록 강력할 순 없었을 겁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
요한이 전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 안에 깊이 새겨진 구원의 표지입니다. 무죄한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 민족을 재앙에서 건져낸 파스카의 표상이지요.
또 이사야 예언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 나오는 "입을 열지 않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사 53,7 참조) 역시 하느님 말씀 안에 기록된 메시아 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과 역사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아무나 가리키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요한 1 32).
요한은 자신이 본 내용을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세례 때 광경이라 보여집니다(마태 3,13-17 참조).
그 자리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성 삼위 하느님께서 온전히 현존하셨지요. 그날 그 자리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허락된 이 "봄"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관상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도 이 "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2,2).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이는 예수님의 첫 번째 나타나심인 강생 너머의,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재림이나, 우리 각자의 영혼이 지상 순례를 마치고 천상에서 뵈올 그리스도와의 해후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곧 어떤 장막도 너울도 가리개도 없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참조). 그리고 그렇게 마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봄", 관상은 하느님과 우리 서로를 닮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 볼 것이고 그렇게 서로 보면서 닮아가니까요.
완전한 선, 완전한 아름다움, 완전한 진리이신 분이 우리의 부족하고 나약하고 미비한 꼴을 취하시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지요. 반면 죄인인 우리는 주님의 의로움, 거룩함, 순결함을 입어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1요한 3,3)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아갑니다. 그런데 사실 알수록 모르는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육신의 눈으로 그분의 자취와 기적들을 세상 안에서 보는 가운데 그분을 알아가는 "지상적 봄"도 가능하고, 영혼의 눈으로 뵙긴 한 것 같은데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천상적 봄, 신비적 봄"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건 이 모두가 그분께서 보여 주실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 그래서 증언하였다"(요한 1,34).
물론 "봄"의 일차적 수혜자는 보는 이 자신입니다. "봄"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충만하게 되지요. 그는 봄으로써 더 믿게 되고 더 알게 되고 더 큰 확신에 차 증언합니다.
이 "봄"이 진중하고 겸손하며 순결한 지향의 채로 걸러져 세상에 조심스레 흘러나올 때, 세상은 어느 결에 주님을 닮아간 이에게서 희망을 보고 구원을 이야기할 겁니다. 결국 보는 이가, 기도하는 이가 세상에 하느님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화답송).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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