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독서들은 표면적으로는 "말씀"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여러 각도로 "말씀"을 향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요한 복음 머리말인 '말씀 찬가'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로 시작해 '사람이 되신 말씀'에 대해 소개한 대목이 세례자 요한의 일화로 이어지면서, '말씀이신 분'과 비교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모습이 "말씀"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사람들은 절제와 금욕생활로 자신을 단련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죄를 듣고 세례를 베푼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자기들보다는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운 존재로 보이니까요. 그런 그들의 질문에 요한은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나는 아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 명확한 자기인식에 근거한 겸손입니다. 그는 "소리"입니다. 공기와 마찰해 발생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소리 안에 담긴 내용입니다. 소리인 요한이 전하는 바는 그 내용이신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요한 1,25).
이처럼 점잖게 묻고는 있지만 속뜻은 "네가 뭔데? 무슨 권한으로?"입니다. 정화와 성별의 의식인 세례는 제도적이거나 영적인 권한이 뒷받침이 된 이들이 주로 베풀지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요한 1,26).
요한은 이제껏 이스라엘에서 사람에 의해 베풀어진 세례와, 오실 분이 베푸시는 세례를 구별합니다. 사람은 물로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마태 3,11; 마르 1,8; 루카 3,16; 요한 1,33 참조).
제1독서에서 서간의 저자는 잠시 그리스도교에 적을 두었다가 다른 교설에 현혹되어 이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이들을 언급합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1요한 2,24).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처음부터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교에 입문할 때 들은 기초 교리이기도 하고, 서간 첫 머리에 언급했던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 생명의 말씀"(1요한 1,1)을 가리키기도 하지요.
간직하는 것은 머무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간직하는 것은 무언가를 내 안에 품는 것이고, 머무르는 것은 내 안에 품은 줄 알았던 무엇(말씀, 그리스도, 성령 등)이 점점 커져서 오히려 나를 품는 상태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뒤이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간직하면 ...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1요한 2,24).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1요한 2,27).
이 서간의 수신인들은 기름부음받은 이들이고 또 그 상태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입니다. 기름부음은 성령의 세례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 다가오신 말씀을 받아들여 간직하고 머무름으로써 거룩한 말씀이 부어져 말씀의 존재가 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시고 속뜻을 밝혀 주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니 성령과 말씀은 별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8).
이제 서간의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명령에 가깝게 권고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말씀(가르침, 성령)을 간직하십시오" 또는 "말씀(가르침, 성령)에 머무르십시오"가 아닐까 합니다.
헛된 교설에 휩쓸리거나 현혹되지 않으려면, 이제껏 믿고 사랑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들은 것을 잘 간직하고 기름부음받은 상태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모르는 분!"
바로 오늘 말씀들의 백미가 이렇게 드러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모릅니다. 그분이 부족한 우리의 앎 저편에 계시기 때문이고, 유한한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영역까지 담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직하고 품고 보존하고 머무른다 해도 우리가 아는 것은 모르는 것에 비하면 대양의 물 한 방울도 못 되고 대기의 초미립자만큼도 못 됩니다.
그런데 그 "모르는 분"이 우리 "가운데에" 서 계십니다. 무지하고 우매한 우리 틈을 뚫고 들어오셔서 자리를 잡고 계십니다.
마음껏 당신을 간직하고 머물라고요. 심지어, 당신을 뜯어 먹고 마시라고까지 하십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당신을 알게 하고 싶다고, 우리와 한몸이 되고 싶다고 하십니다.
기도는 모르는 분 앞에 장님인 채로 서서, 내게 감추어진 신비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간직하고 머무르는 것은 내가 아는 단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 편에서 선택해 다가오시는 말씀을 무작정 받아 그 안에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시작은 모두 무지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아는 분보다 모르는 분이 우리를 더 가슴 뛰게 하고 설레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게 처녀지인 "모르는 신비"는 우리 영혼을 행복한 긴장으로 생동하게 해줄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뭣도 모르고 주님을 향해 피 끓는 애정으로 감히 들이대는 이 무모한 사랑도 "몰라서" 용인되는 무죄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러니 사랑하는 벗님!
"모르는 분" 앞에 겸손되이 머무릅시다. 그편이 안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진리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모르기는 하지만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므로"(1요한 2,17) 우리는 감히 진리이신 그분 안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끝내 모르는 채여도 괜찮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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