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2월 23일 연중 제7주일 - 오상선 신부

dariaofs 2020. 2. 23. 05:59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도처에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만드신 함정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파놓은 함정들입니다.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세부적 가르침들에는,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마저 돌려서 대주라는 것,


속옷을 빼앗으려는 이에게 겉옷까지 내주라는 것, 원수 사랑 등등 읽자마자 곧 '나는 그렇게 하지 못 하는데' 하며 자괴감에 빠지기 쉬운 내용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자칫 자기 성찰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얼굴을 놓쳐버릴 공산이 크지요.

실제로 말씀 기도에서 과도한 성찰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갇혀 버리면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고 자기만 보다가 기도가 끝나버리지요. 묵상도 관상도 아닌 제 생각의 꼬리만 좇다가 슬픔과 고통만 가득 안고 허망히 끝맺고 맙니다.

그럴 땐 자기 꼬락서니에 코를 박고 있는 시선을 단호히 들어올려 하느님을 보도록 애써야 합니다. 자기 반성은 그쯤 해두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아야 합니다.


어차피 백날 고민해봐야 스스로 고칠 수 없는 결점과 어두움이 말씀에 깃든 하느님의 힘으로 정화되고 성화되길 청하며 하느님을 받아들여 머물러야 합니다.

서론이 길었는데요, 오늘 말씀에 드러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레위 19,2)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화답송)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화답송)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마태 5,48).

오늘 말씀 안에 드러나신 하느님은 어려운 규정들을 정해놓고 우리가 지키나 못 지키나를 감시하는 날 선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거룩함과 사랑, 자비와 용서, 연민이 넘치는 아버지십니다. 그분의 완전성은 착하고 좋은 이들뿐만 아니라 악하고 패덕한 박해자와 원수까지 제외하지 않으시고 품으시는 온전함입니다.

그렇다면 그분께 우리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1코린 3,16)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3,1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 3,22).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고 그분 소유인 우리는 그분을 모신 거룩한 성전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기 마련이니 우리도 그분의 거룩하고 선한 성정을 닮았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잘났건 못났건 안쓰럽고 가여워하시며 돌보십니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성을 큰 그림 안에서 볼 수 있다면, 앞서 언급된 세부적 가르침들, 오른 뺨 왼 뺨, 속옷 겉옷, 천 걸음 이천 걸음, 원수 사랑 등등이 훨씬 수월히 다가옵니다. '아버지 자녀인데 그쯤이야...' 하면서 말이죠.

예수님은 우리가 못 할 일들을 덫처럼 뿌려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쏟아지는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면 앞다투어 하고 싶어할 일들을 알려주고 계실 뿐입니다. 물론 그 모범을 먼저 당신이 보여 주시지요.

설령 누군가 내게는 원수이고 박해자여도 하느님은 그를 미워하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미움에 대한 하느님의 무능함이 사실 우리에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우리가 자신을 조금만 돌아봐도 알 수 있지요. 그 무능함 덕에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성전입니다. 감히 거룩함을 넘보는 죄인이고, 자비의 수혜자들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입당송).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영성체송).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이에게서 드러나는 증거는 "기쁨"입니다.

악을 이긴 선의 기쁨, 자아를 이긴 영혼의 기쁨, 미움을 이긴 사랑의 기쁨, 폭력을 이긴 약함의 기쁨, 욕정을 이긴 거룩한 기쁨, 완전하고 거룩하신 아버지와 하나된 기쁨!!!


이 기쁨은 오늘 우리에게 제시된, 무척 어려워 보이는 세부적 가르침들을 실행하고도 남을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접근하면 영 못 할 일도 아니게 되지요.

복음 환호송은 "어떻게"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복음 환호송).

인간적으로 실천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시험이 언제 닥칠지 우리는 모릅니다. 신앙을 증거하려 괜히 원수를 만들 수야 없는 일이니까요. 다만, 매순간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 준비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머무르고 하느님께 머무르며 살다 보면 그 말씀이 우리를 물들여 어느덧 당신을 닮게 만듭니다.


그렇게 그분에게 물들어버리면 우리도 그분처럼 미움에 무능한, 사랑의 존재가 될 것이니까요. 그때에는 세세한 계명조차 우리에게 불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사랑이 완성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우리, 말씀 안에서 하느님만 바라봅시다. 그러면 못 할 일이 없을 겁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