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2월 25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dariaofs 2020. 2. 25. 07:07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바람이 상충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 9,33)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두 번째로 이어지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자리 싸움입니다. 스승의 안위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기"(마르 9,32) 때문입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명에 무지한데다 진실을 직면하기 두려워하다 보니 그들의 관심사는 지극히 세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주님 영광의 날을 위해 자기들 안에 어서 순위를 정하고 싶어합니다. 권력과 명예가 보장된 자리를 탐하면서요.

제1독서에서는 마치 그들 면전에 대고 묻듯이 공동체 내부의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하지만 욕정을 채우기 위해 탐욕을 부리는 것은 세상의 친구가 되려 하느님의 적이 되는 꼴입니다. 그리고 그런 청은 결코 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야고 4,10).

세상과 우애 쌓기를 포기하고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길을 택하고 싶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낮추고 작아지고 비우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길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제로 보여주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 그를 껴안으시며"(마르 9,36)

더 커지려는 욕망으로 이글대는 장정들 가운데 서 있는 작은 아이를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작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요. 그런데 영문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세워진 그를 예수님께서 껴안으십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소중하고 귀하게, 아주 사랑스럽게...

'더 높아지고 더 커지고 더 몸을 불려 위대해져야 하느님께서도 나를 알아주시겠지' 하고 생각한다면 착각 속에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작아져야 주님께서 우리를 안으실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통치 원리입니다. 이 세상 질서 안에서 가난해지고 꼴찌 되고 종이 되는 건 사실 그닥 유쾌한 일은 못 됩니다. 무시당하고 제외되어 끝을 모른 채 밀려나다 보면 존재감마저 희미해집니다.


분노와 울분, 체념과 자포자기 외에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게 되지요. 그러니 누구도 본능적으로는 이 길을 좋아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가게 만드는 힘은 우리에 앞서 이 길을 걸으신 주님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창조를 통해 당신을 비우시고,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니까요. 어쩌면 그분은 스스로 자청해 꼴찌의 자리를 꿰어차고 종의 자리까지 탈환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복음 환호송).

엘리트 바리사이 유다인으로서 인간적으로 자랑할 게 참 많았던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말만 아니라 그는 실제로 그렇게 예수님 뒤를 따랐지요. 그러니 십자가는 세상 끝자락, 꼴찌 자리의 쓴맛을 달콤하게 만들고 종의 비참함을 영광의 희열로 바꾸는 신비한 묘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길에 마냥 내려가는 방향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강의 절정 뒤에는 반드시 극적인 반전의 상승이 뒤따릅니다.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9,31).

우리는 수난 예고의 무게에 짓눌려 부활의 희망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는 "그분께서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그러니 주님과 함께 내려가고 주님과 함께 죽고, 그래서 주님과 함께 부활합시다. 사순절이 지척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