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4월 2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dariaofs 2020. 4. 2. 06:08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아브라함이 반복해 등장합니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 17,5).

구약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단순히 그 사람을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운명을 담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이름을 받는 것은 새 존재로 거듭 나는 것이고 이제부터 새 소명을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뜻의 히브리말 "아브 하몬"과 연관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에 길을 나선 아브라함을 당신 백성의 선조로 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7).

아브라함은 주님의 축복으로 많은 짐승과 종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낯선 땅에 몸붙여 사는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아직 직계 자손도 없다 보니 혈족 관계를 탄탄하게 형성하기 전이고, 무엇보다 세상을 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삶의 근간을 붙들어줄 힘과는 이제야 비로소 관계를 맺어가는 중이었지요.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창세 17,8).

주님께서 이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얼마나 큰 힘과 위안을 주는 말씀인지요. 오래 몸붙여 살아도 여전히 내 것이 아닌 이방 지역 광야에서 든든한 보호자, 벗,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확인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소환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이 말씀이 유다인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유다인들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모세와 같이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느님과 직접 계약을 맺은 위대한 성조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율법이나 어기는 몽상가 젊은이가 감히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다니 몹시 괘씸하고 불쾌한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요한 8,53)

그간 신념과 자부심에 차 머물던 안전지대에 진동과 균열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진리가 다가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용보다는 방어와 의심, 반격을 선택하기 일쑤지요.

"내 아버지시다 ... 너희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요한 8,54).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우리 하느님'이라 부르는 그분이 내 아버지시다..." 라고요.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셔서 계약을 맺은 아브라함이 위대하다면 그 하느님의 아들은 과연 어떠할까요!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

예수님 입에서 가슴 떨리는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아십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서로를 아는 만큼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에 모두 아십니다. 서로 아는 존재들 사이에는 사랑이 흐릅니다. 앎은 사랑에 찬 인식입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요한 8,57)

그런데 유다인들은 핵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 당신이 누구신지를 "너희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말씀하셨음에도 줄곧 아브라함을 물고 늘어집니다.


조상도 좋고 가족도 좋고 동료도 좋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성인데, 유다인들은 직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요한 8,59).

결국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하고,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십니다. 자칭 하느님 백성인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돌로 쫓아낸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인들의 계속되는 배척의 사건들과 함께 신앙의 중심이 불가피하게 이동됩니다.


성자 예수님의 오심과 현존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잊지 않으신 하느님 자비의 연속이고 확장이며 완성임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열지도 않고 내버린 선물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성인들을 통해 주님을 느끼고 거룩한 자극을 받습니다. 훌륭한 위인들과 이웃을 통해서도 그렇지요.


그런데 그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귀해도 우리의 목적은 아니지요. 그들이 반향하는 하느님 모상을 통해, 하느님을 향해 더욱 오롯이 정진하라고 보내주신 길벗이고 안내판이며 이정표들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당에 가지 못하는 날들이 점점 길어져 속상하시죠? 괜찮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자리가 곧 성전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선물,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말씀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 길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고운 길벗이고 기도의 동반자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