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성령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평화"(요한 20,19.2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기원하십니다. 스승을 잃고 두려움과 근심에 찬 시기를 지나고 있는 그들에게 평화는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도 그분 현존 만큼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평화는 성령의 분위기입니다.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요한 20,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심을 보여 주시려고 상처를 열어 보이십니다. 스승을 죽음에 이르게 한 형벌의 자국이지만 지금은 스승을 알아볼 단초인 셈이지요.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상처라는 걸림돌에 발목 잡힌 사람과, 상처라는 디딤돌을 딛고 일어선 사람으로 나뉠 겁니다. 지금의 예수님처럼, 상처는 "나"임을 증거하는 훈장이 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마주섰을 때, 우리가 지상에서 당신을 따르느라 입은 상처를 보시고 주님은 우리를 알아보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상처는 영혼에 아름다운 무늬로 새겨져 향기마저 풍길 겁니다. 상처는 성령의 은신처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셨듯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지만 감행하십니다. 제자들의 인간적 수준과 상태를 보면 어불성설이지만, 예수님은 믿는 구석이 있으십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변화시켜 주시고 지켜 주시리라는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파견은 성령을 받은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매순간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누구에겐가 파견됩니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온라인상의 친구든, 아니면 우리 기도에 맡겨진 세상 저편의 누군가든 말입니다.
"숨을 불어넣으며"(요한 20,22).
우리는 창조의 첫 숨을 아버지 하느님께 받았습니다. 이 숨이 우리 영혼과 육신의 생명이 되어,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되었지요.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 곧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입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하느님 모상성이 극대화되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교부들이 '신화(Deificatio)'라 일컫는 상태입니다.
"용서"(요한 20,23).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후 콕 짚어 언급하신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가 얼마나 중요하면 그러셨을까요?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용서할 일이나 용서받을 일이 없는 사람도 드물 겁니다. 주님 앞에서 영혼을 살피며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용서한, 혹은 용서하지 못한 사연들이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겁니다.
맨 힘으로는 어려운 게 용서지요. 여간 잘 하지 않고는, 열심히 애쓰다가 한 순간 와르르 무너져 되돌이표를 찍고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게 용서 같습니다. 그래서 용서에는 성령의 숨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바탕이 된 용서와 그렇지 않은 용서는 천양지차입니다. 용서는 성령의 증거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리신 순간이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은가?"(사도 2,11)
인간의 오만이 쌓은 바벨탑의 몰락은 언어의 분열을 초래합니다(창세 11,1-9 참조). 의미를 담고 소통하는 언어의 전달 방식뿐 아니라 사고방식과 문화, 습성 등등 모든 것이 갈라지지요. 그뿐입니까? 우리는 같은 언어, 같은 역사, 같은 문화를 공유한 이들 안에서도 도무지 소통할 수 없는 한계를 자주 느끼며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신 영혼은 나와 다른 문화, 출신, 인종, 성별, 공통분모 없는 삶의 기반을 지닌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알아듣는 능력 또한 받게 됩니다.
지성으로 이해한다기보다 사랑으로 수용하는 것이지요. 또 성령 안에서 나누는 우리의 말을 공통분모 없는 그들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기적도 일어납니다. 말이 언어로 전달되는 차원을 넘어 사랑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말하는 주체는 사랑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 오신 목적을 정확히 제시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7).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와 직분과 활동, 능력과 열매는 공동선을 위함입니다. 혼자만 간직하고 즐기라고 주시지 않으셨다는 뜻이지요. 주인에게서 받은 한 탈렌트를 땅 속에 묻었다가 혼쭐이 난 종의 이야기처럼(마태 25,24-30 참조), 자칫 성령의 은사를 외면하거나 사장시키는 잘못은 은총의 착복과 배임이라고까지 볼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올해 성령 강림 대축일은 특별한 것 같습니다. 재의 수요일 즈음에 시작된 공동체 미사 중단이 부활 시기 중반을 지나면서 조금씩 풀리다가,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요즘 다시 긴장 상태로 이어지고 있지요. 우리의 얕은 지력이나 좁은 시각으로는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이 온 세상을 휩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 더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나는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자신과 온 세상을 성령께 의탁합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성령의 은사가 모여 세상이 외치는 절규의 외마디를 알아듣는 귀가 되기를, 세상이 흘리는 고통의 눈물을 닦는 사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공동선을 위해 모두에게 유익이 되고 힘이 되는 백배의 열매로 맺히기를 축원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 아멘. 알렐루야!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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