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집착은 무절제한 욕망과 다를 것 없다”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시련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의 원인 중에 하나는 ‘집착’이다. 집착은 물건, 재물, 건강, 능력, 자리, 사람 등에 대한 외적인 것에서부터, 과거 기억, 칭찬, 실수, 미운 사람 등에 대한 심리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무엇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게 해 그것에 묶이게 만들어 우리를 외적, 내적, 영적으로 고착되게 한다.
이러한 집착의 반대 개념은 ‘초연함’이다. 머튼은 “초연함은 도달하기 힘들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성”이라고 강조했다. 근본적으로 초연함은 ‘분리’를 뜻한다. 영적 여정에서 초연함은 창조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인데, 이는 자신이 창조된 목적과 자신의 최종 행복을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기 위해서다.
초연함, 세상을 물러나 하느님께로 가는 것
우리는 물질적 소유, 명예, 유명세, 권력, 건강 등을 찾으며 살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인간의 완전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창조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본래의 창조된 영역 밖으로 가야만 한다. 그래서 초연함은 사람들과 세상을 물러나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초연함은 창조물에 대한 애착, 심지어 하느님의 선물에서도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아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이런 자유로움 속에 있는 이들은 모든 망상을 내려놓고 진정한 실재를 볼 수 있는 초연함에 도달한다.
그런데 초연함에 도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머튼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한두 사람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고 우주의 붕괴를 막는 사람입니다”(「새 명상의 씨」)라고 했다. 이기심과 애착은 마지막까지 ‘우리 힘으로 넘을 수 없는 산’이다.
머튼은 초연함에 도달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로 ‘융통성 없는 경직성’을 들고 있다. “가장 엄격한 수도원에서도, 완덕을 닦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는 곳에서도 많은 사람은 그들이 자기도 모르는 이기심에 얼마나 지배를 받고 있는지, 그들의 덕행이라고 하는 것이 편협하고 인간적인 이기심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생각조차 못 합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초연해지지 못하는 것은 사실 흔히 열심하다는 사람들의 이런 융통성 없는 경직성 때문입니다.”(「새 명상의 씨」) 융통성 없는 경직성을 벗어나 진정한 영적 자유로움에 도달하려면 자신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려는 망상을 포기해야 한다.
앞서 서두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초연함에는 외적, 내적, 영적인 레벨이 있다. 물론 인간의 삶을 획일적으로 구별할 수 없고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이 하급 단계의 수준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이 어떤 이에게는 외적인 물건이나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어떤 이에게는 인정받고 싶거나 심리적 만족에 대한 집착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영적인 은사를 많이 받고 싶은 집착으로 고상하게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적인 자아를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겨야
머튼은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한 시작으로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권고한다. 이를 넘어 영적인 좋은 것들로부터도 초연할 것을 당부한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서 물질적, 정신적 사물들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순수하게 소유하고 즐기려면 모든 기쁨을 초월하고 모든 소유를 넘어야 합니다.” (「새 명상의 씨」) 내적인 자아를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길 때 주님의 은총은 우리를 망상적 자아에서 벗어나 영적인 자유로움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영적인 쾌락에서 오는 집착에 대해 생소할 것이다. 머튼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이 기도에서 오는 기쁨이나 평화,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을 맛보았다. 그는 영적인 기쁨에 대해서도 초연할 것을 당부한다. 머튼은 관상이나 기도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내적인 평화와 하느님 현존을 느끼는 데만 집착하게 되는 경우를 경계한다.
“명상이라는 것도 결국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적 평화에 대한 느낌 역시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포도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적 ‘의식’은 맥주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또 하나의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이어 영적인 쾌락 역시 집착이라고 강조한다. “명상과 내적 평화, 하느님 현존에 대한 느낌은 영성의 쾌락이고 다른 것들은 물질의 쾌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기쁨에 절대 깊이 빠져들지 못합니다. 관상의 초보자들에게나 주어지는 보잘것없는 위로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새 명상의 씨」)
초연함에 도달하려면 결과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결과들에서 적당히 물러서야 하고, 선의와 내적 생활의 고요한 표현 활동에 만족해야 한다. 자기 삶을 바라봄 없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즉각적인 보답을 기대함 없이 일하는 것에서 만족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하고 특별한 인정을 받음 없이 존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인간은 섬이 아니다」)
그렇다고 초연함은 세상의 불의에 대해 방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진리, 곧 하느님에 집중할수록 결과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 초연함은 결국 하느님의 더 큰 선과 자비를 믿고, 그분 마음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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