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dariaofs 2020. 9. 11. 02:50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지금은 당신께 배우는 입장이지만 앞으로는 하느님 백성을 도와주어야 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간절한 권고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먼저 우리는 이 말씀이 눈먼 이의 능력을 한정하거나 비하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말씀에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 하느님 사랑에 눈이 뜨이지 않은 신앙의 초심자들과, 그들을 안내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신 것이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느님께 대한 앎과 그분 사정에 한 발 먼저 눈을 뜬, 따뜻하고 선명한 시력의 인도자이길 바라십니다. 그들에게 이끌려 신앙의 여정에 들어선 이들이 헛발 디디지 않고 애먼 데를 헤매지 않도록 말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들보와 티는 아주 대조적 심상입니다. 들보는 크고 무거운 반면 티는 아주 미세하고 가볍지요. 또 들보는 한자리에 놓이면 여간해서는 옮기기 어렵지만 티는 쉽게 움직입니다. 혹 천재지변으로 들보가 제 자리를 이탈하게 되면 누군가를 해치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지만 티는 소소한 불편을 주는 정도로 그칩니다. 들보와 티는 그런 조합입니다.

그래서
"내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는 제자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의미심장한 비유가 됩니다. 조금 먼저 배우고 믿어서 다른 선량하고 순수한 초심자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이들의 들보는 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지요. 더 널리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들일 경우, 그 반대의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2)

그런데 제 눈의 들보를 알아차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제 몸처럼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고, 타인의 선의와 순수를 왜곡하고 굴절할 만큼 시력을 잠식했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먼저 출발한 영성생활이라도 섬세하게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영혼을 가다듬는 꾸준한 노력이 없으면 시야를 지배하는 것이 제 눈인지 들보인지조차 알아차리기 어렵게 되어 버립니다. 위험천만하게도 들보인지 눈인지도 모르면서 섣불리 형제들에게 메스를 들이댈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신앙과 사랑의 영역에서는 물론 기본적인 도덕 윤리적 영역에서도 늘 삼가하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도 모르는 들보가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선포자로서의 자신의 포부를 밝힙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앞서 사도는 복음 선포가 자신의 직무이며(1코린 9,17 참조), 복음에 동참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한다고 고백했지요(1코린 9,23 참조). 이토록 자신감 넘치는 사도에게도 노심초사 긴장하는 부분이 없지 않은데, 정작 먼저 예수님을 체험하고 열성으로 그 복음을 전한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건 구원의 길에서 뒤쳐질 수도 있다는 염려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들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구원을 향해 매진하는 것으로 더 생생히 복음 선포자의 소명에 투신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타인에게 복음이 되어야 할 우리도 이 건강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말이나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말과 실천과 표양으로 전해지니까요.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선 자신에게서 들보를 발견하고 치워버리는 겸손하고 성실한 자기 부정과 비움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제를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함부로 "티"를 지적하거나 메스를 들이대지 않는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지요. 지도나 교정 등 모든 일에 앞서, 티 정도를 묻히고 있는 그 형제를 사랑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우선되어야 할 겁니다.

저마다 크기와 무게가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들보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넓고 깊게 자리하면서 사사건건 시야를 가리우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형제의 티가 보이면, 들보의 발동인지 사랑의 발동인지 먼저 성찰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성급히 나섰다가 모두 구덩이에 빠지거나, 티도 못 빼주고 형제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좀 불편하고 아플 수도 있지만, 자신의 들보를 찬찬히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너무 크고 험하고 위압적인 들보가 발견되더라도 놀라지 마시고요. 일단 스스로 자신의 들보를 알고 나면, 의외로 이 부끄러운 들보가 부족하고 죄인인 타인을 포용하게 해 주는 선물이 되기도 한답니다. 빼내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요. 그건 주님께서 함께해 주실 겁니다. 나 자신과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