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본질을 보라고 촉구하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루카 7,31)
예수님께서 탄식하듯 물으십니다. 계속 엇박자만 고집하는 장터 아이들의 시끄러운 놀이를 언급하십니다.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이지요. 그런데 이천 년 전 세대나 지금 세대나 이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빵을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자"(루카 7,33)
세례자 요한은 광야의 철저한 금욕자로, 또 앞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예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만의 독특한 양식이라기보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 무수히 족적이 찍힌 수많은 예언자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을 바라보는 종교 기득권층의 눈초리는 곱지 않습니다. 자신들 계보나 교설과 맥을 같이하지 않는다고 보여서일까요? 일부는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와서 세례를 청하기도 했지만, "독사의 자식들"라는 비판 어린 독설까지 들어야 했지요(마태 3,7-12 참조). 어쩌면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요한의 외침이, 자신들이 소유한 공고한 종교 카르텔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34)
이번에는 예수님을 향한 비난입니다. 요한의 금욕을 조롱하던 이들이 이번에는 일반인들과 함께하는 모습에 제동을 겁니다. 군중과 똑같이 먹고 마시며 가난한 이들, 곧 율법과 권력과 자본이 소외시킨 이들 곁에 스스럼없이 머무르시는 예수님이 불편한 겁니다.
아무래도 당시 종교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 수석사제와 원로, 최고의회 의원들은 하느님의 때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은 모양입니다. 진리와 공동선을 위해 지혜를 모으기보다, 사사건건 반대를 위한 반대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내지요. 그래서 장터에서 악다구니를 쓰는 철부지, 고집쟁이 아이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가장 중요한 본질을 밝힙니다.
"사랑이 없으면 ...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사랑은 우리가 구해야 할 "더 큰 은사"이고 우리가 들어서야 할 "더욱 뛰어난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뛰어든 이 신앙생활의 정수라고 할 수 있지요. 각자 하느님에게서 받은 능력과 재물과 지혜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 "사랑"이 없으면 그저 자기 영광을 위한 세속 활동일 뿐,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유명한 코린토1서의 '사랑의 찬가'는 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반복해 읽고 듣고 새기는 것만으로 성찰과 감사와 깨달음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말씀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지닌 각자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사랑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지곤 합니다. 그래도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 그때에는 ...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이는 부족한 사랑을 품은 채, 휘청대고 넘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사랑의 길을 걷는 이에게 주시는 엄청난 선물입니다. 그리움에 가득차 관상하던 주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지복직관,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아시듯 나도 그분을 알게 되고,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영원한 행복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 본질을 붙잡은 이는 굶거나 먹고 마시거나, 임금의 벗이거나 죄인의 벗이거나,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그닥 중요하지 않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던 세례자 요한도 사랑이고, 먹보요 술꾼에 세리,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모든 사고와 지향과 의지를 지배하는 사랑이 중요할 뿐이지요.
굳은 마음들은 그 사랑을 못 알아봅니다. 그리고 사랑에 무모히 저항할 것이고요. 안타깝게도 사랑은 애써 외면하는 이에게 가려져 있어,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을 중심에 품은 이가 바로 하느님을 모신 이, 하느님과 하나된 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도 부족하나마 애써, 힘껏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마주 뵙고, 그분을 온전히 알게 되어 전율할 그날, 우리는 하느님 얼굴에서 서로를 발견하며 또다시 전율할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말씀의 길벗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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