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10월 3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dariaofs 2020. 10. 3. 00:37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누가 주님의 신비를 대면할 수 있는지 봅니다.

제1독서는 고통에 차 울부짖던 욥이 주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승복하는 장면입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 42,3)


풍요를 누리던 욥이 사탄의 농간으로 삶의 나락에 떨어지면서 욥기는 인간 삶의 고통과 실존을 치열하게 다룹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대목은 욥이 감정의 폭풍을 넘어 비로소 자신이 약하고 미소하며,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임을 절감하고 주님께 이를 고백하는 장면이지요.

욥기의 본문 안에는, 경솔한 세 치 혀로 욥의 잘못을 캐내어 자기들의 설익은 신학에 꿰어맞추려는 무례한 친구들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욥이 고통에 대해 항변하는 부분이 꽤 길게 차지합니다. 욥은 극한의 억울함과 서러움이 치받쳐 올라오는 것을 누르지 않고 모든 인간을 대변해 질문하고 또 질문하지요. 그리고 이제, 그는
"폭풍 속에서 말을 건네신 주님"(욥 38,1 참조) 앞에서 온전히 제 자리를 찾습니다. 창조주 앞에 선 작디 작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제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인간으로서 더는 견뎌낼 수 없는 한계점까지 갔던 욥이 주님을 봅니다. 고통과 함께 욥은 신비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주님은 욥이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깨닫자,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그의 자각과 회개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리 하십니다. 고통의 강을 건넌 이에게는 주님의 신비를 마주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복음은 파견을 받아 선교 여행을 떠났던 일흔두 제자의 귀환 장면입니다. 일흔두 제자도 기뻐하며 돌아오고
(루카 10,17), 예수님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루카 10,21)하시니 참으로 밝고 희망찬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하느님은 당대의 석학들이나 종교 지도자같은 제도권의 권위자들이 아니라, 어부와 세리 등 오합지졸처럼 모여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펼쳐 보이십니다. 여러 모로 부족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권한을 통해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민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선사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이들을 통해 전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야말로 진정 "아버지의 선하신 뜻"
(루카 10,21)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루카 10,22)


아버지에 대한 앎은 아들에게만 유보되었고, 아들에 대한 앎 역시 아버지께만 속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 중에 이 신비를 허락받은 한 부류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내세울 것 없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별볼일 없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려 하십니다. 제도와 지식으로 무장한 이들에 비해 공도 더 들고 실패 확률도 커서 그야말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대상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시지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제자들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힘이, 부족한 자기들을 통해서 이루신 업적을 보았으니까요. 그들이 행한 치유와 구마의 기적이 가장 먼저 변화시킨 이들은 바로 제자들 자신들일 겁니다. 그리고 치유받은 이들의 기쁨과 감사를 통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생생히 체험했을 겁니다.

지금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스승을 보는 행복 또한 무량합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곧 하느님의 충만함이고 성령의 흡족함이니, 성삼위 하느님의 완전한 행복이 제자들의 영혼에도 흘러듭니다. 주님의 신비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의 겨자씨 한 알만치도 못 되는 믿음을 통해 작은 이들에게 내리고 작은 이들을 물들여 변모시킵니다. 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하늘 나라의 신비가 아닐까요!

자신의 약함과 작음을 인정하게 되는 여정에는 고통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자신이 한계에 갇힌 한갓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고통이 아니고서는 깨닫기 어려운 신비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보잘것없이 초라한 작음에 질식되거나 좌절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철부지들입니다. 잘나서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이들이지요.

모두가 더 가지려, 더 올라가려, 더 드러내려 하는 세상에서, 비워서 나누고 낮추고 드러나지 않게 사랑하는 우리는 철부지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한 하느님의 귀하디 귀한, "작은 이들"이지요. 우리가 지나온, "악!" 소리 나게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의 자취는 어느새 알알이 영롱한 보석처럼 우리 영혼에 새겨져 빛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지려는 우리에게 허락된 신비는 곧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의 증거입니다.

주님의 작은 이들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으로 철부지인 우리를 묶어 주신 주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
(영성체송) 하고 노래한 시편 작가와 함께 말씀에 의지해 작음의 길, 비움의 길, 낮아짐의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길동무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