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제시하십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어떤 율법 학자가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 영원한 생명을 갈망해서라기보다 예수님 수준을 떠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라면 나름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니 그의 머리에는 이미 답이 들어 있겠지요. 율법이 무엇이라 하더냐는 예수님의 반문에 역시 그는 막힘 없이 정답을 읊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한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이처럼 세 문장을 건네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가 배워온 지식이 틀림 없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율법에는 오류가 없으니, 그가 기억하는 율법 내용 역시 옳고 바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은 그에게 머릿속에 든 것을 실천하라고 독려하십니다. 머릿속에 갇혀 있는 문자들이 구원과 연결되려면 꿰어져야 합니다. 그 지식들을 잇는 고리가 바로 실천입니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실천이 생명으로 연결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율법 학자가 처음 물었던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현세의 삶도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니, 예수님의 답에서는 지상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 하나입니다.
누가 이웃이냐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길 반대쪽으로"(루카 10,32)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레위인은 종교사회인 이스라엘에서 힘과 권한과 거룩함까지 소유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피신한 길 반대쪽은 위험이 제거된 안전지대일지 모르나, 안타깝게도 사랑 역시 진공 상태입니다.
"그에게 다가가"(루카 10,34)
반대로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다가갑니다. 이스라엘이 경멸하는 이방 지역의 부정한 사람이지요. 여기서는 두 부류의 신분적 격차 못지않게, 고통을 겪고 있는 이를 사이에 두고 갈리는 두 방향성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더군다나 그 사마리아인은 제 일을 마치고 다시 이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겠다고 여관 주인에게 약속합니다. 고통 받는 이를 향한 무아적 방향성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됩니다. 진정으로 고통 당하는 이가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고통 겪는 이를 앞에 두고 피하느냐 다가가느냐의 차이는, 인간 안에 보편적으로 내재된 사랑이라는 하느님 모상성을 "실천"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럴 때는 머릿속 지식이나 외적 신분보다 내면에 충만히 차 있는 "사랑"이 동력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을 현혹시키는 "다른 복음"을 우려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갈라 1,2)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구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율법의 내용을 당신 죽음과 부활로 몸소 완성하셨지요.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님에게서 "실천"되어 완성된 율법입니다. 돌판에 새겨지고 일부 소수 계층의 머릿속에 박제되었던 율법이 예수님의 실천으로 피와 살을 얻어 세상에 구현된 것이지요. 말뿐인 교설은 믿음이 약한 이들을 교란시키고 복음을 왜곡할 뿐입니다.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예수님과 율법 학자 사이에서 간결한 질문과 답이 오고갑니다. 예수님 입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자비"라는 단어가 놀랍게도 율법 학자의 입에서 흘러 나옵니다. 이 대화를 통해 처음에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그의 내면에 변화가 시작된 듯 느껴진다면 착각일까요?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방향성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것입니다. 이 방향성은 우리 머릿속 지식과 익혀온 관습, 사랑과 두려움 등등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의 종합적이고 실천적인 표현입니다. 더군다나 이 방향성은 고통 받는 인류를 향해 내려오신 주님의 방향성과 일치하지요. 그리고 이 방향의 끝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 끝에서 구원을 만날 것이니, 그때에는 자비를 입은 그 사람에게 우리가 오히려 고마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마음에 떠오르는 "초주검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실직과 질병, 사고와 이별, 소외와 고독으로 쓰러져 있는 사람이 떠오른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에게 다가가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따뜻한 안부와 염려, 위로와 격려, 작은 나눔과 사랑이 그를 살릴 것입니다. 우리도 살릴 것입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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