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dariaofs 2020. 11. 19. 05:25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두 울음을 만납니다.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기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묵시 5,4)

요한 묵시록 저자는 환시 속에서 어좌에 앉은 분이 들고 계신 두루마리를 봅니다. 일곱 번 봉인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철저히 가려진 신비라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이 두루마리를 들여다보기에 합당한 이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슬피 웁니다. 아직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니까요.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묵시 5,7)

요한은 이내 울음을 그칩니다.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그 두루마리를 펼치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묵시 5,6)이라고 묘사됩니다. 일곱 개의 뿔은 완전한 권능을, 일곱 개의 눈은 완전한 지혜와 예지, 성령의 충만함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수금과, 또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묵시 5,8)

네 생물과 원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립니다. 수금은 찬미와 찬양을, 향은 흠숭과 경배입니다. 그들이 바치는 향은 주님을 믿는 거룩하고 충실한 이들의 기도입니다. 희생되신 어린양이 온 인류의 염원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분이심을 드러내지요.

두루마리, 즉 하느님 말씀을 펼쳐 이 세상에 구원의 지평을 열어 주실 분은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구원자가 부재하는 듯한 절망의 울음을 멈추고 그분께 올려지는 새 노래를 듣습니다. 새 노래는 곧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루카 19,41)

예수님께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며 우십니다. 안타까움의 눈물입니다. 평화의 도성이라 불리지만, 이스라에 역사 안에서 수차례 유린되고 짓밟혔던 곳이고, 또다시 이민족의 칼날에 무참히 부서지지게 될 비극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불신과 불륜으로 하느님을 떠나 제 욕망을 채우던 이들이 맞을 슬픈 운명이 되겠지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예수님의 탄식 안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간절한 바람과 안타까움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평화의 임금을 알아보지 못했고, 때가 되어 이루어질 하느님의 뜻을 간과한 탓입니다.

예수님의 애끓는 눈물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알려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가 물질이나 겉모습, 권력에 있지 않고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누리는 화해와 일치에 있음을,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 때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함을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에서 듣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묵시록 저자가 본 이 아름다운 광경은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우리의 기도가 지상에서는 물론 천상에서도 주님께 흠숭과 경배로 올라간다는 뜻이니까요. 요한은 어린양의 현존으로 위로를 받고, 주님은 우리의 향기로운 기도로 위안을 받으실 것입니다.

자신을 기도 안에 불살라 향으로 올리는 이는 진정한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오신 주님을 깨어 맞이하지요. 주님 안에서 누릴 평화란, 창조 때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움과 진실과 선함이 충만하게 피어나는 상태일 겁니다. 그렇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의 평화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 세상과 천상에서 주님께 향기로운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