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더 늘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다가와 묻습니다. 자신들 조직에 속하지도 않고 계보에도 없는 사람이 나타나서 백성에게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고 그분의 선함을 드러내는 것이 그들에게 위기감을 안긴 탓입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 하는 오만과, "혹시 저 위 거룩하신 분에게서 받은 것이라면" 하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물음이었을 겁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예수님께서 되물으십니다. 사실 생명과 거룩함을 다루는 모든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누군가 그 권한을 위임받아 행사할 뿐이지요. 그런데 권한을 차지한 이들이 권한의 단맛에 빠지면 자칫 그 권한을 자기들 것인양 사유화하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조직과 제도가 너무 견고해지면 주님조차 들어가실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보면 누구에게서 온 권한인지 모를 수 없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모순이 드러날까 두려워 대답을 피하지요.이에 예수님도 똑같이 응수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내려진 참으로 비참하고 가슴 아픈 선고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말씀을 거두겠다고 하시니까요. 말씀이 세상에 오시어 백성 가운데 사시지만, 사람들의 몰이해와 모독은 그 말씀을 막아버립니다. 예수님도 안타깝고 아프시지만 지금은 침묵의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발라암이 등장합니다. 그는 전승에 다라 점쟁이나 주술사, 또는 주님의 예언자라 여겨집니다.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에서 헤매던 이스라엘이 모압을 침략하기 위해 모압 벌판에 진을 치자, 모압 임금 발락이 발라암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는 것이 이 일화의 배경이지요.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민수 24,17)
하느님은 모압 임금이 요청한 저주 대신 축복을 발라암의 입에 담아 주십니다. 게다가 발라암의 눈에,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닌 먼 훗날의 일까지 보여 주시지요. 아직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나눠 정착하기도 전에 "오실 분"에 대한 예언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발라암의 이 말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성자께서 오시어 세상을 구원하시리라는 하느님의 계획이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 전에 이미 섭리되었음을 오늘의 말씀이 증명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천 년도 하루 같으신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말하지 않겠다." 하시는 예수님 말씀과, "지금은 아니다." 하는 발라암의 신탁이 함께 묘한 긴장을 건넵니다. 주님은 이천 년 전에 분명히 오셨고 올해도 반드시 오시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침묵"이시고 "아직"일 뿐이니까요.
강생의 신비, 성탄의 신비는 오시는 말씀에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이들에게 열리는 문입니다. 불신과 안일함, 무관심의 동굴에 머리를 넣고 어둠을 이불 삼아 덮은 채 이대로가 안전하고 좋다고 경계하는 이는 물리적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빛의 시기가 돌아와도 늘 대림이고 사순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멈추시지 않도록, "아직"의 시간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다가오시는 말씀에 마음을 활짝 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과 사람에게서 오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시력과 용기 또한 주시길 청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장 처참한 십자가 위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고 사랑한, 고도로 발달된 영적 시력의 소유자셨으니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길 청합시다.
십자가의 성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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