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지상 순례자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마르 6,8)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명령하십니다. 낯선 미지의 길 위에서는 그동안 누려온 것들이 아쉬울 수도 있고, 굶주림과 강도와 맹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 벌 옷과 신발, 그리고 지팡이만 지니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단호하기까지 합니다.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마르 6,10)
게다가 예수님은 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기웃거리며 옮겨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호평과 대접과 칭찬은 당장 달콤할지 모르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착각하게 만드는 진실의 훼방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복음이 물질로 선포되지 않고 비움과 가난, 겸손과 낮춤으로 선포되는 신비라는 것, 그리고 두둑한 주머니와 든든한 뒷배가 기쁜 소식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을 제자들이 실제로 체험하길 바라시는 겁니다.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되 이 세상에 매이지 않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구약의 현장과, 우리가 향하고 있는 천상 예루살렘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히브 12,22)
구약의 백성은 주님께서 시나이에 나타나셨을 때 모세에게 중개를 요청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류가 맺은 새로운 계약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계약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계시고 천사들과 의인들의 영이 우리를 기다리며 응원해 주시는 곳입니다. "주님의 피"로 속량된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지복직관의 행복이 기다리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요.
지상 순례 여정을 지나는 우리는 저마다 떠나온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귀로 안에 있습니다. 천상 예루살렘으로 귀향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지상 순례길을 더 가볍고 단순하게 걸으라고 권하십니다. 자기 맘대로 안 되는 자신에게도, 내 맘 같지 않은 타인에게도 안달복달 연연할 것 없이, 담백하고 순수하게 당신께 의탁해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12)
제자들의 두려움을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그처럼 명령하시니 제자들은 씩씩하게 나아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마와 치유의 기적을 베풀지요. 제자들은 자기들의 재산과 능력으로 우쭐하기보다, 가난과 결핍 중에 주님의 힘이 드러난 것을 흡족히 여길 것입니다.
매 미사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복음 선포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충만함과 능력 뿐만 아니라, 보잘것없음과 약함, 가난과 부족함을 통해서도 주님께서 드러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세상 물질과 욕망에서 자유로울수록 복음의 향기는 더 멀리 향기롭게 퍼져 나갑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허락받은 생명에 대해 감사하며 충실히 채워나가야 할 선물임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주인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니라고 허락하신 것만으로도 사실 인생길이 모자람 없이 충만하다는 걸 우리는 삶의 질곡을 통해 알아가는 중입니다. 복음이 그런 우리를 통해서도 전해지니 놀랍지요. 이 또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지상 순례길을 걸으며 말씀에서 힘을 얻고 주님께 의탁해 나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이 길에 동무가 있으니 더 큰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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