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꿈꾸던 청년, 한국 교회 최연소 주교로 서품,,, 소공동체·평신도 사도직 활성화 이끌고 한일 주교 모임 초석 쌓아
▲ 이문희 대주교(맨 왼쪽)와 마더 데레사 수녀. 1981년 5월 성 마더 데레사 수녀가 당시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 초청으로 대구를 방문했다. |
“사랑하는 순간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의 보람도 커집니다.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은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는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이를 사랑하는 데 힘써 주십시오.”
이문희 대주교가 2015년 9월 14일 계산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사제 수품 50주년 기념 미사에서 한 말이다.
정치를 꿈꾸다 사제가 되다
이문희 대주교는 1935년 대구에서 아버지 이효상(아길로) 선생과 어머니 한덕희(어지나)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대주교는 집을 구할 때 먼저 성당이 가까운지를 보고 정할 만큼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제6ㆍ7대 국회의장을 지낸 아버지 이효상 선생에게서 무엇보다 깊은 신앙심을 물려받았다. 이 대주교는 “나의 신앙생활은 재를 지키며 하는 것만이 아니고, 또 겉으로 드러내 보이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며, 세상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강한 신념을 어릴 때부터 키워나갔다”고 회고했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 좋아하고 놀기 좋아했던 그는 6ㆍ25전쟁을 겪자 저녁마다 계산성당을 찾아가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쳤다.
전쟁 후 정치인이 되기 위해 경북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한 그는 당시 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였던 김수환 신부와 친분을 쌓아가며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사제 성소의 싹을 틔웠다. 하루는 김수환 신부가 그에게 더글러스 하이드가 쓴 「공산주의냐 가톨릭시즘이냐」를 주면서 꼭 읽기를 권했다.
“원래 나는 대학을 들어갈 때 정치가가 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나 경제 등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할 사람도 많은데, 인간들을 하느님과 가까이 있게 해서 우리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신부님이 되려는 사람이 드문 것 같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어요.”(「저녁노을에 햇빛이」 중에서)
1957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단돈 미화 10달러를 들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프랑스 리옹신학대학과 파리가톨릭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했다. 이 대주교는 특히 1962년 파리 신학생 시절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정신과 프랑스 교회의 변화를 몸으로 체험하고 1965년 12월 23일 파리 생쉴피스성당에서 블랑쉬 대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1966년 7월 초 귀국한 그를 공항에서 맞이한 이는 마산교구장이 된 김수환 주교였다. 이 대주교가 사제 성소의 싹을 틔우고 결실을 보고 돌아온 자리에 항상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
▲ 보좌주교 서품식 후 아버지 한솔 이효상(아길로) 전 국회의장과 어머니 한덕희(어지나) 여사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이 대주교. |
▲ 이문희 대주교(맨 오른쪽)와 김수환 추기경이 2003년 2월 22일 대구 지하철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공부한 신식 주교
이 대주교는 귀국 후 동촌본당 주임, 청주교구 내덕동본당 보좌, 군종 사제를 거쳐 1972년 10월 7일 대구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됐다. 그해 11월 30일 주교품을 받고 37세 나이로 한국 교회 최연소 주교가 된 그는 보좌 주교로 14년을 살면서 서정길 교구장 주교를 보필했다.
“나는 주교직을 수락할 때 교구장이 아니라는 말에 용기를 내서 서명했다.… 보좌 주교로서 가장 잘해야 할 일은 교구장 대주교의 뜻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신부와 함께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내가 주교가 되어 주교회의에 나갈 때부터는 시국 문제로 시끄러웠고 주교회의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밖에서는 주교회의에도 진보파와 보수파가 있다고들 야단인데 그것은 과장된 세속적 표현이고, 다 같이 교회를 위하는 마음뿐인데도 그 표현 방법이 조금 다르고, 또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파의 수장이 서 대주교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 앉으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제일 젊은 주교였다. 내 생각에는 내가 제일 늦게 신학 공부를 했으니 사실은 내가 제일 신식이어야 했다. 공의회 끝날 때에 신학교를 졸업했고, 또 공부한 곳이 파리라서 공의회의 물결은 이미 밀려오고 있는 가운데 신부가 된 사람이고, 그로부터 몇 년도 되지 않아서 주교가 되었으니 당당히 새 물을 먹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물로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책)
이 대주교의 회고처럼 그의 보좌 주교 생활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공화당 출신 국회의장 아버지를 배경으로 권세를 부리고 있다고 이 주교를 비방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김수환 추기경이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한번은 어떤 모임에서 주교님들이 담소하는데 그 가까이에 서 있는 나에게 김 추기경님이 오시더니 아무 말 없이 메고 있던 십자가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 놓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배웠다.” 김 추기경은 언제나 이 대주교의 ‘영적 아버지’로서 그를 지지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이 주교는 주교 직무를 하나씩 배워가면서 묵묵히 교구장 주교를 보필하며 대구대교구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이 대주교는 서정길 대주교를 보좌하면서 1979년 대구가톨릭대병원을 개원하고, 1982년 선목신학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교)을 개교했으며, 신나무골과 한티성지를 개발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평신도사도직협의회’를 운영해 평신도들의 교회 참여를 이끌었다.
▲ 이문희 대주교가 1986년 7월 5일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착좌 미사 후 이 대주교가 신자들에게 강복하며 퇴장하고 있다. |
제8대 대구대교구장
14년 뒤 이문희 대주교는 1986년 7월 5일 서정길 대주교에 이어 제8대 대구대교구장으로 착좌했다. 서정길 대주교와 이문희 대주교의 이ㆍ취임은 교구장의 75세 정년을 권고하던 새 교회법에 따른 것으로 교구장 선종이나 공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교구장 재임 중 이임과 승계가 이뤄진 한국 교회의 첫 번째 역사적인 일이었다.
대구대교구장에 착좌한 이 대주교는 2007년 4월 24일 퇴임할 때까지 21년을 교구장 주교로 사목했다. 교구장 착좌 당시 신자 수 20여만 명이던 것이 퇴임 때에는 45만여 명으로 늘었다. 본당 수가 79개에서 147개로 늘었다. 교구장 재임 동안 2배 이상의 외적 교세 성장을 이룬 이 대주교는 1997년 11월부터 1999년 10월까지 2년여간 교구 시노드를 개최해 대구대교구의 내적 쇄신을 이뤄냈다. 새천년기에 부응하는 쇄신된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이 대주교는 교구를 5개 대리구 체제로 전환하고, 소공동체 모임 활성화와 복음 나누기 등을 통해 교구민 복음화를 위한 틀을 마련했다.
“대구대교구가 역사상 사목적으로 뒤지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모범적인 사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 주교는 목자이므로 그가 이끌어가고 있는 무리를 알아야 한다.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 교회의 쇄신 작업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 교회의 쇄신은 주교가 필요하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모든 구성원 각자가 해야 되는 일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같은 책)
이 대주교는 교구장 재임 동안 사제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는 속 깊은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보여 사제단의 존경을 받았다. 또 누구보다 사제 양성을 위해 헌신했고, 사제단 일치를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이 대주교는 특히 사제 평생 교육, 공동 사제관 및 공동 사목 등 미래 지향적인 사목을 전개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 이 대주교는 평신도 사도직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사목평의회와 재무평의회 구성을 골자로 한 본당 기구를 개편해 평신도들이 사목 활동의 주체가 되어 본당 운영에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 아울러 본당 사회복지위원회 설립, 지역민과 함께하는 재가 복지 활동, 무료급식소 ‘요셉의 집’과 ‘인성의 집’을 열어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이 대주교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서 나라와 정치, 국민이 잘못 가고 있는 부분에 대해 담화와 메시지를 통해 성찰과 각성을 촉구했다. 이 대주교는 2003년 3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있었던 직후, 희생자들을 위로하면서 “이제 우리는 각자의 삶을 가다듬고 질서를 따라 철저한 삶을 사는 태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 IMF로 국민 전체가 고통받고 있을 때 “우리 모두가 제자리를 찾고 최소한의 본분을 확인하고 수행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며 “참으로 자기보다는 남을 위해 사는 마음을 가져달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주교회의 의장
1993년 가을 정기총회에서 3년 임기의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이문희 대주교는 재임 동안 한국 교회사에 남을 세 가지 일을 시작했다. 그중 가장 큰 업적은 한일주교교류모임의 초석을 놓은 일이다. 199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이문희 대주교는 하마오 후미오 주교에게 한일 양국 교회가 협력해 동아시아 선교에 힘쓰자며 의기투합한 것이 한일주교교류모임의 계기가 됐다. 첫 모임은 이듬해인 1996년 2월 ‘한일 교과서 문제 간담회’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이후 한일 양국 주교단은 동일한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해 2004년 한일 학생 공동 한국사 입문서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한국과 일본-」을 출간하는 성과를 이뤘다. 한일주교교류모임은 아픔의 역사를 넘어 화해와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양국 관계의 새로운 징표가 되고 있다.
두 번째는 ‘로마 한인 신학원’을 설립한 일이다. 로마 한인 신학원은 전교 지역 교회에서 세운 첫 번째 신학원으로 지금은 명실공히 한국 교회의 로마 대표부 역할을 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중국과 대만 교회와의 교류이다. 한국 교회가 아시아 교회를 위한 봉사자로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인식한 이 대주교는 북경 신철학원과 교류하고 중국인 신학생을 국내로 유학시켜 양성했다. 아울러 북경과 상해, 남경 등에 한인 신자 공동체를 설립하고 교구 사제를 파견했다. 이외에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산화 작업 시작 등 짧은 3년 임기 동안 많은 일을 했다.
▲ 이문희 주교(당시)가 1984년 5월 5일 대구를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를 영접하고 있다. |
▲ 주교회의 의장 이문희 대주교와 일본 주교회의 의장 하마오 후미오 주교가 1996년 2월 16일 도쿄 일본가톨릭회관에서 환담하고 있다. |
▲ 교구장 퇴임 후인 2011년 12월 26일 산타 모자를 쓰고 호스피스병동을 방문해 환자를 위로하는 이문희 대주교. |
임기 3년 앞두고 사임
이문희 대주교는 교구장 임기 3년을 남긴 2007년 3월 29일 스스로 사임하고, 그해 4월 24일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 대주교는 “서정덕 보좌 주교 장례 미사를 집전하고 내 손으로 서품한 신부들을 제적해야 할 때 고통이 심했다”며 “육체적, 정신적, 영성적으로 부족하다는 신호를 받았다”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
“교구에 병이 난 것 같았다. 교구의 젊은 신부가 서품 1, 2년도 되지 않아 떠나갔다. 그것도 한 해에 셋이나 연달아, 그것도 미련없이 버젓이 떠나갔다. 처음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고, 어찌 된 일이냐고 혼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데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원인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교가 신부의 생각을 짐작도 못 하니 그 이상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같은 책)
이 대주교는 퇴임 후 다음 해 식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교구 문서를 정리하고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북한 라선국제가톨릭병원 초석 다져
2005년 8월 5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아연합회는 함경북도 라선시 연주동에 ‘라선국제가톨릭병원’을 개원했다. 북한 주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종합 의료시스템을 갖춘 이 병원은 1995년 김수환 추기경과 이문희 대주교, 두봉 주교, 고 김남수(수원교구장) 주교와 노트커 볼프 수석 아빠스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 교회가 도움을 줘 북한에 지은 최초의 병원인 이 병원을 위해 이 대주교는 사재를 몽땅 털어 기부하다시피 했다. 라선국제가톨릭병원의 개원을 누구보다 기뻐한 이 대주교는 “꾸준하게 북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면서 “남북 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은 단순히 국가나 우리 교회 차원뿐만이 아니라 인류 평화에 큰 기여를 해가는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시인이자 사상가
이문희 대주교는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시선집 「오후의 새」, 저서 「저녁노을에 햇빛이 1ㆍ2」, 「밝은 날이 다가온다고 누가 알려줍니까」, 「사랑으로 부르는 평화의 노래」, 역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싶다」, 「복음과 폭력과 평화」, 「삶, 죽음, 부활」 등의 책을 펴냈다.
그는 2008년 9월 ‘한국떼이야르연구회’를 설립해 20세기 신학자요 진화론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의 사상 연구하고 그를 알리는 데 앞장서 왔다.
또 이 대주교는 2004년 한국여기회를 설립해 나가이 다카시(바오로, 1908~1951) 박사가 주창한 ‘여기애인’(如己愛人-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정신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나가이 박사는 원폭 피해자를 위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신앙을 증거했던 핵의학자이다. 이 대주교는 한국여기회 회원들과 함께 비무장ㆍ비핵 운동에 앞장서 왔다.
▨ 이문희 대주교가 걸어온 길
▲1935년 9월 14일 대구 출생
▲1959년 3월 경북대 정치학과 졸업
▲1962년 6월 프랑스 리옹 신학대학 철학과 졸업
▲1965년 12월 23일 사제 수품
▲1966년 6월 프랑스 파리 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1966년 12월~1967년 12월 청주교구청 근무
▲1967년 12월~1969년 1월 가톨릭액션협의회 담당 사제
▲1969년 4월~1972년 4월 군종(공군)
▲1972년 11월 30일 대구대교구 보좌주교 수품, 교구 총대리
▲1977년 7월~1978년 5월 계산주교좌본당 주임
▲1985년 1월 5일 교구 부교구장 대주교 승품
▲1986년 7월 5일 교구 대주교좌 계승, 교구장 취임
▲1993년 10월~1996년 10월 주교회의 의장
▲1996년 11월~1999년 10월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
▲1999년 10월~2004년 10월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위원장
▲2005년 10월~2007년 3월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
▲2007년 4월 24일 교구장직 이임
▲2021년 3월 14일 선종
리길재 기자(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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