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임금이 어떤 존재인지 물으십니다.
"그 무렵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판관 9,6)
어제 제1독서에서 만난 기드온은 판관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며 마흔 해를 평온히 다스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임금이 되어 달라고 했지만 "여러분을 다스릴 분은 주님이십니다."(판관 8,23) 하며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임금이 아닌, 봉사하는 판관의 자리를 지켰지요.
하지만 그 역시 나약한 인간으로 자기 집안에 올가미가 될 죄를 짓게 되니(판관 8,27 참조) 일흔 명의 아들들 사이에 살육이 일어나고 맙니다. 기드온의 아내 중 스켐 출신 소실이 낳은 아비멜렉이 권력욕에 사로잡혀, 스켐 지역 지주들을 등에 업고 건달들과 함께 자기 형제들을 모조리 살해한 것입니다. 막내 요탐만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져서, 오늘 제1독서 대목에 나오는 '임금의 비유'로 스켐의 지주들의 양심을 일깨우려 합니다.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판관 9,9.11.13)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등 인간에게 이로운 열매를 내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임금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정체성과 가치를 잘 알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그것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하려 하지요. 그들에게 임금이란 고작 타인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무게중심(줏대) 없이 흔들거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신정에서 사람이 임금으로 등극하는 왕정으로 넘어가는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판관 9,15)
그런데 가시나무의 반응은 상당히 다릅니다. 언급된 나무들 중 가장 그늘이 빈약하고 쓸모도 적은 식물이면서 당장 허세와 위협으로 으름장부터 놓습니다. 고문 도구나 땔감 외에는 별 쓸모가 없던 가시나무가 기다렸다는 듯 제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그 첫 마디가 파괴와 죽음의 겁박입니다. 인간 역사 내내 곳곳에서 출현한 불의하고 무자비한 임금들의 행태가 고스란히 들어 있이지요.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다섯 차례나 장터에 일꾼을 구하러 나섭니다. 그리고 삯을 치를 때, 하루종일 고생한 일꾼이나, 짧은 시간 일한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지요. 사실 이 값은 일꾼들과 처음부터 합의한 금액입니다.
그런데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들은 주인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했음에도, 짧게 일한 이들이 그 금액을 받는 걸 보자 자기들은 응당 더 받으려니 기대했다가 결국 김이 새고 말지요.
하늘 나라의 임금님은 이 선한 포도밭 주인처럼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하는 분십니다. 그분은 받는 만큼 주려고, 눈에 불을 켜고 계산하는 분이 아니라 아낌없이, 목숨까지 내어주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줄을 세우고 자격을 정해 순위를 매기고 더 탐하는 이는 받는 쪽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이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싶으면 불편해서 못 견딥니다. 세상이 정한 질서에 하늘 나라가 맞춰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런 태도는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늘 임금님께, 군림하고 지배하고 줄 세우는 인간 임금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질서에서 벗어나면 시기와 질투로 자기와 타인을 해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시기와 질투는 겉으로는 혜택을 받는 이에게 불쾌감을 쏟아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느님의 선하심이 못마땅해서 그분께 대적하는 것이니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선하고 공정하시며 의로우신 하느님을 믿지 않을 뿐더러 그분을 반하는 처사이기 때문이지요.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화답송)
인간의 임금은 사실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온 세상과 하늘 나라의 주인께서 이루시는 업적의 지상 협력자로 충실히 일하면서, 그분께서 이루시는 업적에 경탄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라고 뽑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백성에게 군림하고 다스리려 하면 세상이 몸살을 앓지만,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백성에게 봉사하고 섬기면 하늘 나라는 성큼 다가옵니다. 지도자는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시는 하늘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백성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종들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당신을 바라는 이들에게 약속한 상급을 반드시 주시는 의로운 분이시며, 자격과 가치를 따져 홀대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늘 임금님께서 이처럼 자비롭고 관대하며 선한 분이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주인과 함께하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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