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앙 돋 보 기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21. 사회 공동체의 위기 ④ 잔인하고 위험한 무관심

dariaofs 2022. 5. 3. 00:37

무관심에서 벗어나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범 따라야

 

▲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형제들에 대한 정의가 사라질 때, 이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모든 생명이 위험해진다. 그림은 ‘부자와 라자로’ 에히터나흐 필사본. 출처=위키피디아


2013년 10월 1일, 필자는 한 인터넷 신문기사의 사연을 접하고 씁쓸하고 우울했던 마음을 한동안 떨칠 수 없었다. 그 기사는 부산 시내 한 주택가에서 돌아가신 지 5년가량 지난 한 할머니의 시신이 백골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집주인은 몇 년간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할머니 시신을 발견했는데, 그 당시 할머니 모습은 두꺼운 옷을 아홉 겹 껴입고 손에는 목장갑을 낀 채, 백골 상태로 반드시 누워있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살던 건물은 단층 짜리 다세대 주택으로 모두 세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이웃들은 할머니가 사정이 생겨 집을 비웠다고 생각했을 뿐, 돌아가신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홀몸노인으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한 인간의 외로운 죽음도 안타까운 일인데, 더군다나 5년이 지나 백골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생각하니, 그 죽음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오늘날 이웃에 대한 무관심한 세태가 몹시 원망스러웠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더불어 필자 역시 무관심한 세태에 편승하여 어려운 이웃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살아온 모습이 ‘잔인한 무관심의 공범자’라고 여겨져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무관심은 아주 위험하고 잔인한 태도

2020년 10월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회칙을 반포하셨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교황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존엄성을 지니도록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형제자매로 살아가도록 불림 받았음을 강조한다.

 

우리 시대는 과학기술과 인터넷의 발달로 예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연결돼 서로 이웃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언급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서로에게 소속감을 주는 형제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 못하며 개인적인 이익만 북돋을 뿐, 삶의 공동체 차원은 약화시켜, 점점 고독해지고 고립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12항)

 

교황은 특히 잔인한 무관심(72항), 위험한 무관심(73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사는 사회공동체가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위태로운 상태임을 상기시켰다.

 

요컨대 ‘무관심’은 자신의 감정에 거리를 두는 중립적인 태도가 아니라 아주 위험하고 잔인한 태도임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권력, 축재, 분열의 삿된 이익에 동원되는 폭력”(72항)에 동조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세계의 많은 곳을 황폐한 거리로 만들 뿐 아니라 기회의 박탈로 소외된 많은 이들을 이 황폐한 거리에 내모는 것”(71항)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은 불편한 상황이 우리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눈길을 돌리고 옆을 스쳐 지나가는 상황들을 무시하는데 우리가 익숙해져 있을 뿐 아니라(64항),

 

우리 사회 역시 자기 자신에만 사로잡혀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편하고 번거롭게 여기는 잔인한 사회, 타인의 고통에 등을 돌리면서 번영을 추구하려는 병든 사회라고 말한다.(65항)

사회적 책임 촉구한 프란치스코 교황

우리가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서로에게 소속감을 주지 못하고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할 뿐 아니라 폭력까지 휘두르는 것은 ‘죄의 상처’로 인해 ‘카인의 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연쇄적인 죄의 상처가 치유되는 순방향이 아닌, 오히려 악화되는 역방향, 즉 형제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함, 폭력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형제들에 대한 정의가 사라질 때, 이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모든 생명이 위험해진다고 성경은 말한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창세 6,13)

 

오늘날 인류가 형제적인 책임이라는 요청을 수준 높게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능하게 계속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창세기 하느님의 경고가 더 큰 재앙의 형태로 우리에게 현실화될 것이다.

 

돈과 잘못된 가치에 대한 우상숭배, 하느님이 창조하신 생명 질서에 대한 도전, 형제애에 대한 상실과 서로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의 삶을 뒤틀리게 할 뿐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곧 이 세상을 얼마나 위태롭게 하고 있는지 그 위험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형제들」 회칙에서 루카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무관심에 빛을 비추고 있다.

 

강도 만난 쓰러져 위험 중에 있는 사람을 보살피지 않고 냉혹하게 지나치는 ‘사제’와 ‘레위인’의 모습에서(루카 10,31-32) 오늘날 ‘무관심’의 역병에 걸린 우리들의 모습을 성찰하게 한다.

 

무관심은 위험에 처한 약자들의 ‘존엄성’을 보호하지 않고 방기하는 잔인한 태도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유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이 세상을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떤 근본적인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되는 것이다.(67항) 우리가 무관심과 냉담한 자세를 넘어서서 쓰러진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을 일으키고 회복시켜 가는 ‘공동선’을 추구할 때, 무너져가는 공동체는 재건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칙에서 ‘사회적 책임’을 촉구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 마디가 가슴 깊이 와 닿는다. “고통 앞에서 무관심한 삶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닙니다.”(68항)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