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조규만 주교 |
2009년 6월 29일 베드로 사도 축일을 기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세 번째 회칙 「진리 안의 사랑」을 발표했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하느님의 약속이며 우리의 희망"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바로 이 사랑이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는 생명의 빵이다. 좋은 것일수록 짝퉁(모조품)이 많다. 교황은 그 점을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한 진리라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많이 닮게 된다.
교황은 이미 첫 번째 회칙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선포하며 사랑이신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대부분 가요나 시, 소설이 사랑을 주제로 다룰 정도로 사랑은 오늘날 인간들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주제이며 그리스도교 신앙도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많은 경우 상대방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방을 사랑함으로써 즐거움을 찾고 그렇게 해서 사랑이 시작된다. 그 사랑의 정상은 아가페적 사랑일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1코린 13, 3-7)
이 말씀에 비춰 나를 바라보면 자신이 없어진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다'고 할 때 하느님에 대해 조금밖에, 내가 사랑하는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셈이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랑을 체험하고 있을까? 분명 사랑 체험을 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의 체험을 통해서도 하느님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체험한 하느님 사랑 이야기이고,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체험한 하느님 사랑 이야기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하느님을 마음과 힘과 생명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제물로 바치신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또 사람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기꺼이 돌아가실 만큼, 우리의 양식인 빵이 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희망이 되신다.
하느님 사랑 자체를 가장 잘 이해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은총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기점이 된다. 성숙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사랑이 아직까지는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하는 마음에는 논리적 이성이 끼어들지 못한다. 계산도 이익도 따지지 않으며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와 논리가 있다. 하느님께 바탕을 두지 않는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인간을 충만하게 하고 온전한 본연의 상태로 이끌어 해방시키는 사랑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다. 그것은 순수하게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강요될 수 없으며 자유를 바탕으로 한다. 사랑이 결여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고독이다. 고독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수용되지 못할 때 생겨난다. 권력도 사랑에 대치된다.
권력이란 한 사람이 다른 이를 지배하는 것이기에 개방되도록 만들어진 인간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은총은 이러한 인간의 불능성에 대한 해답이다.
사랑의 한 가지 행위로 은총과 깊이 관련되는 용서가 있다. 용서는 사랑의 가장 뚜렷한 행위다. 예수님은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통해 하느님을 소개하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 뜻을 철저하게 따른 예수님은 7번씩 70번까지 용서하라고 자신 있게 권유할 수 있었다.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한 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의 반성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용서'라는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자케오, 야곱의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 막달라 여자 마리아, 무엇보다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 집에서 베풀어진 향연에서 마리아 모습이 대표적이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용서받을 뿐 아니라 많이 용서하는 사람이다. 많이 용서받기 위해서도 많이 용서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탕자의 비유'는 끊임없는 인간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모습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이미 탕자를 용서했다. 날마다 동네 어귀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탕자의 귀향과 '하느님 제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습니다'는 죄 고백은 아버지가 용서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귀향과 죄 고백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에게 예수님은 "나는 네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여인이 죄를 고백했는지, 회개했는지, 어떤 결심을 했는지 성경은 알려주지 않는다. 먼저 예수님이 '용서'를 말씀하셨다.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할 수 있다.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용서하는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분이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사랑이 작고 작은 사랑밖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참으로 큰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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